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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ohyun Choi Jul 07. 2020

어느 누가 누군가의 삶에 이리도 깊게 개입할 수 있을까

R.I.P Ennio Morricone (1928-2020)

언제부터 ‘영화’를 봤을까


어릴 때 봤던 영화들 중 기억에 아주 또렷이 남아있는 작품들이 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푸른 하늘 은하수’... 국민학생들에게 왜 십 년도 넘은, 눈물을 짜내야 하는 영화를 보여줬었는지 (아마도 학교 단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보러 갔던 ‘우뢰메’. 이후로 이런저런 만화영화를 봤었겠지. 나에게 외국 영화 혹은 외국 드라마로 처음 기억나는 건 ‘초원의 집’. 그 이후로 줄줄이 미드가 TV를 찾아왔다. 맥가이버, V, 에어울프, 에이특공대, 기동순찰대, 전격 Z작전(이때 나오던 차들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그런 거지).....

장르 불문 영화를 꽤 많이 보는 편이다. 선호하는 장르가 없지 않지만 가려서 보지 않는다. 다만 상당히 시끄럽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과한 코미디는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음악 때문에, 미술감독 때문에, 배우 때문에, 원작 때문에... 가지가지 이유로 영화를 보지만 영화는 나에게 쉼과 인사이트를 선물하는 시간이므로 함부로 비평을 하거나 후기를 남기거나 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 차곡차곡 레코드해 놓을 뿐.
좋은 영화는 두 번 이상은 보고 한 번은 넋을 놓고 보았다면 다른 한 번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들을 메모하기 위해 적을 것을 꼭 손에 쥐고 보는 습관도 있다.


35년도 넘은 관계


이제 새로운 음악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엔니오 모리꼬네..... 별세 소식을 듣고 오늘은 온종일 짬짬이 그의 음악을 들었다. 밤이 되어 정신을 좀 차리고 가만히 앉아있자니 내가 살아온 여정의 곳곳에 풍요로운 감성을 심어줬었구나 싶어 고맙고 서운하고 슬프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지만, 내게 의미 있는 아이들만 되짚어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아마도 제대로 기억나는 첫 외화인 것 같다.
스토리도 화면의 전개도 너무 재미있어 이후로도 두세 번은 더 봤다. 음악이 너무 좋아 노란색 을지악보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1980년대 영화음악 악보 하면 ‘영웅본색’이 대표선수였었지.. 그때는 몰랐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누구인지.


분명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음악이 먼저 들린다.
‘선율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책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름다운 느낌이 어린 나에게도 느껴졌다. 영화 ‘미션’(1986)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언터처블’(1987)을 흥미롭게 보고, 그리고 ‘시네마천국’(1988). 그때서야 영화에 ‘음악감독’이라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음악의 중심에 엔니오 모리꼬네가 있었으며 이전 기억의 중간중간에 그의 음악들이 굵직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에게 천국이었던 ‘시네마천국’, 그리고 ‘러브어페어’


‘시네마천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족히 10번도 더 본 것 같다. 당시 엔니오 모리꼬네는 환갑이 다 되었을 때니 왠지 영화 속 할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도 하면서. 이 영화가 내게 남겨 준 또 하나의 기억은 근자감으로 달랑 하나 원서 넣었던 대학 첫 시험에서 똑 떨어지고 풀이 죽어 있는 나를 찾아왔던 반가운 녀석 둘... 1994년 1월 말인지 2월 초인지... 그 녀석 둘은 대학에 합격했고 난 떨어진 뭐 그런 상황이었다. 친구 응원해줘야 한다며 아직 입학도 안 했으면서 무슨 대학생 인양 한껏 멋을 부리고 나타났다. 셋이 보러 간 영화는 오리지널판을 기준으로 장면을 더 붙인 감독판 ‘신 시네마천국 Nuovo Cinema Paradiso’였다. 우리가 처음 봤던 시네마천국은 오리지널이 아니라 해외 배급용 축약판이었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세세하게 다 이야기하는 것 같아 처음 본 것이 더 좋기도 하고, 그것이 너무 여러 번 보아 익숙해져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의 ‘내 신세’ 때문에 몰입을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여전히 기억나는 건 나를 중심으로 양쪽에 앉았던 두 녀석이 매우 여러 번 훌쩍거렸다는 거다. 하나는 조각가로, 다른 하나는 피아니스트로 아주 멋지게 살고 있는 그네들의 소식을 접하면 난 여지없이 그 날의 강남역 어느 극장이 생각난다. 피아노를 치던 녀석의 영화음악 재연도.
‘벅시’(1991), ‘시티오브조이’(1992), ‘사선에서’(1993)... 그래도 머리가 좀 커다래진 고등학교 이후의 영화들은 꽤 꼼꼼히 봤었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희한하게 생긴 건물을 막 날아다니는 느낌으로 액션을 펼치는 장면이 나오는 ‘사선에서’.. 1997년 여름에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여행하던 당시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갔는데 세상에! 낯익은 곳이었다. 어버버하며 스탭에게 물었더니 거기가 맞단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날아다니던 원기둥 여러 개인 그 호텔. 영화음악을 틀어줬다. 과하게 감동적이게... 칵테일을 마셨고, 마신 잔을 들고 갈 수 있다고 해서 옷으로 둘둘 말아 캐리어에 넣었던 기억도 난다.
울프(1994)도 좋았지만, 미션-시네마천국- 그다음을 잇는 ost 전체를 외웠던 러브어페어(1994)가 등장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영화로 기억한다. 아네트베닝의 눈부셨던 때도.

다양한 장르의 영화음악을 참 기막히게 펼쳐냈다. ‘스타메이커’(1995), ‘스탕달신드롬’(1995)도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또 어마어마한 음악이 등장한다. 대놓고 천재 피아니스트와 트럼펫 연주자의 이야기,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웅장하기도 슬프기도 짠하기도 허무하기도 그러다 또 벅차기도 했던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 역시 엔니오 모리꼬네...

이후에도 계속 좋은 작업들을 많이 했던 그, 음악보다 영화의 스토리가 더 많이 남는 ‘말레나’(2000), ‘베스트오퍼’(2013), ‘시크릿레터’(2016)...
어! 이상하다... 시간이 확 벌어지는데 싶어 곰곰이 생각하니 그 중간중간에 한국영화가 마구마구 쏟아졌으며 또 중간중간은 한스짐머가 채워줬었다. 한스짐머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음악에 서사가 느껴지고 내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들이다.



굿바이, 엔니오 모리꼬네


어제 지인의 스토리에 올라왔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The Legend of 100’을 들었던 오늘 아침, 잠시 아무도 없었던 루프탑에서 듣는데 오랜만에 뭔가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93세로 세상을 떠난.... 얼굴도 본 적 없는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떠나는 길에 고마움과 그리움을 담아 손 한번 더 흔들어 배웅해 본다.

얼마 전 밀턴 글레이저의 별세 소식이,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가...
매해 그랜드마스터클래스 무대에 서실 때마다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몰라요.”하시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분명 올해도 나오신다 했는데 며칠 앞두고 어렵겠다 하신 안내 공지가 뜨니 벌써부터 걱정이다. 얼른 건강이 회복되시기를 기도한다.
이 시대의 어른들이, 이 시대의 지성과 교양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들이 한 분 한 분 떠나시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이상한 사람들을, 황당한 세상을 누가 꾸짖어주나 싶기도 하고.
또 며칠 지나면 늘 지내던 일상처럼 그렇게 살겠지.

오늘은 그리워해 보련다. 세상과 이별한 별. 세. 하신 거장들을

주저리주저리 글을 마무리하다 갑자기 생각났다.
요요마의 엔니오 모리꼬네 연주 앨범 CD. 내일 찾아봐야지.
또 생각났다. 1994년 강남역 어느 극장은 ‘뤼미에르’였다.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칼럼은 금요일까지로 양해를 구하고 미루어 놓고서는 이 무슨 긴 글 장난이냐... 뭐... 오늘 밤에는 해야 할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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