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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ug 25. 2024

경비원이 경비나 설 것이지!

패트릭 브링리(2023).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웅진

경비원이 경비나 설 것이지! 딴짓을 하다니. 그랬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딴짓을 한 거다. 다른 경비원들은 그냥 경비만 섰는데, 그는 그냥 선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살펴보고 생각하고 텅 빈 마음을 채워간 것이다. 그럼에도 잘리지 않은 거로 봐서, 그가 고도로 눈치가 빠른 인간이거나, 주변 경비원들이 좀 둔하거나, 그를 관리하는 관리자들이 약간 멍청하거나.


"예술을 배운 것이 아니고 예술에서 배운 것이다." 이 한 문장으로 끝났다. 어쩜, 작가가 하고픈 말을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해 놓다니! 예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 심오한 것 같은데, 그러니 어렵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우린 우선 머릿속에 달달 지식을 넣으려고 한다. 르네상스인지 고딕인지 비잔틴인지. 유화인지 수채화인지 조각인지. 라파엘로인지 미켈란젤로인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지, 아님 고흐인지, 마네인지, 피카소 인지 등등. 더 아는 게 없나? 얄팍함이 드러났다. 그랬다. 나는 말이다.


어느 날 바티칸 박물관에 간 날. 열심히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름 공부를 해도 고백하건대, 난 뭘 외우려고 했었다. 작품들을 시대 배경을 작가들을 어떻게든 돌에 새기듯 외우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가겠는가. 박물관 나오자마자 50%는 아마 잊었을 것이다. 다음 날은 아마 80%? 심했나? 그나마 돌아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복기를 해보고, 필요하면 다시 좀 더 배워서 기억을 연장시켜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을, 일부는 천재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에서 뭘 배울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책의 원래 제목이 All the beauty in the world이다. 이를 어떻게 번역할까? 원제목이 예술에서 배운 것을 말한다면, 번역서 제목은 좀 더 호기심에 치중한 것 같다. 경비원 주제에 이렇게 멋진 사고를 하다니? 설마,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경비원이 경비나 서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미술관 경비원이었으니, 경비를 얼마나 잘 섰는지, 경비를 서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주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건방지게. 미술관 큐레이터도 아니고. 미술사가도 아니고. 그는 그냥 경비원인데 말이다.


그는 2008년 형을 잃었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잊어버렸다면 그는 미술관 경비원이 될 리가 없었다. 두 살 터울 형이 암으로 먼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그때 그는 미국의 뉴요커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하고 우애가 얼마나 깊었던지 그는 집이 있던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면서 그간 살아온 생활방식을 일순간에 바꾼다. 형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수히 드나들지만, 일의 방식은 아주 단순한 경비원, 그곳에서 조용히 서 있기만 하는 직업. 그걸 10년 동안 하게 된다.  말이 쉽지 10년 동안 경비원 일을 하다는 것이.


그것이 가능한 건, 그에게 미술관은 온종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공간이기에,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의 성향과 아주 잘 맞은 것이다. 내성적인 성격이 한몫 발휘한 것도 틀림없었을 텐데, 그렇게 그는 형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텅 빈 마음을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한다. 주변에 널려있는 흔하디 흔한 뛰어난 작품들을 보면서 남들은 그냥 경비만 보는데, 그는 그 작품들로부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이란 그리 별난 것이 아니며, 예술가들 또한 죽음 앞에선 아주 평범하다는 것.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을 잃은 슬픔으로 세상을 벗어나려 선택한 그곳에서, 그는 같이 일하는 평범한 동료들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는다.


그가 뉴요커에서 4년 동안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엘리트였던 것과 다르게, 그의 동료들은 암살을 피하려 미국으로 망명한 이민자, 문학 작가를 꿈꾸며 등단을 준비하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군인으로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보험회사에서 20년간 일하다 경비원인 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 이건만, 같은 경비복을 입고 서로 부딪치며 부대끼는 과정에서, 어느 날 그를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그늘 밑에 숨었던 상흔들을 그는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그렇게 보낸 10년이 된 어느 날 그는 역시나 불현듯 세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10년 전의 그가 아니다. 옛날의 그가 아닌 건 아주 당연한 것. 그렇게 돌아온 후 쓱 책이 이 책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작가는 예술로부터 배우라고 했지만. 그게 뭔지를 떠나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뛰어난 예술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강조하는 책으로도 읽혔다. 생각해 보면, 뛰어난 예술가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이나 죽음 앞에서 결코 불평등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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