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신혼여행, 그리고 이바지까지
드디어 무섭고 긴장되고 이상한 결혼식 당일. 나는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이 싸우지만 않으신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약간 반쯤 포기 상태가 되어 그래, 싸우셔도 뭐. 사람들이 한 번 씹다가 잊어버리겠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결혼 이제 아흔에 가까워진 아버님이 곳곳에서 짜증을 좀 내시기는 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정신없게, 무난하게, 신속하게 흘러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버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드리고 나서, 나는 2층으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가 안 보이셔서 먼저 가신 줄 알았는데 우연히 옷을 갈아입으면서 만났다. 오빠는 없고, 나 혼자만 있는 가운데!
- 나 좀 지하철 역까지 태워다 주련?
- 어머니, 저희 여기 앞에서 친구들이 기다려서요. 인사를 가야 해서. ^^;
- 그럼 차에서 기다리마.
- 어머니, 그런데 여기 지하철 역 바로 앞이에요!
- 그러냐?
그때는 저 말하는 게 너무 무섭고 이상했다. 왜 지하철 역까지 태워다 달라고 하시는 거지? 바로 앞인데? 왜 친구들한테 인사를 간다는데 기다리신다는 거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웃는 척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오빠에게 매달려, 어머니한테 저렇게 얘기했는데 싫어하시진 않을까? 온갖 걱정을 했다. 오빠는 쿨했다. 엄마는 신경도 안 쓰실걸?
시간이 좀 지나고 '생초보 며느리'에서 '초보 며느리'로 레벨업하고 보니, 어머니는 정말 지하철 역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아들이 태워다 주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 태워달라고 하신 것이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니 비용이 나가지 않고, 그러면 OK. 내 아들 결혼식에 당연히 너네가 태워다 줘야지, 대접을 받아야지. 이런 마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은 알겠다. 그때는 몰라서 전전긍긍했지만.
친구들과 결혼식장 바로 앞에 있던 삼겹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서울의 한 주택가 2층에서 5500만 원짜리 방 두 개짜리 전세를 얻어 같이 살던 남자 두 명과 그의 여자 친구들이 어느덧 자라 결혼도 하고 방 두 칸씩 있는 전세도 얻게 되었다니, 뭐랄까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배가 잔뜩 부른 상태로 공항 앞 호텔에 도착했다. 좋은 호텔이었다. 그 좋은 호텔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한 건 '일'이었다. 결혼식장 비용을 결제하고 남은 오빠의 축의금과, 내 쪽으로 따로 들어온 축의금을 정산하고 정리하고 통장에 넣었다.
야근에는 야식이 빠질 수 없지. 그리고 나는 왠지 호텔에 가면 룸서비스를 시키고 싶다. 왠지 나도 여유롭게, 하얀색의 바삭거리는 침대에 누워 가격은 1그램도 신경 쓰지 않고, 익숙하게 키친 단축번호를 눌러 무엇과 무엇, 그리고 칵테일이요. 를 주문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메뉴판을 펼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후, 카드값과 나의 식탐을 잘 조율해서 가성비가 뛰어난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 직장인의 숙명..
그래서 나는 그때 미역국과 통새우 구이를 주문했다. 일단 뜨끈한 미역국으로 속을 좀 달래고, 통새우 구이와 맥주를 함께 마시며 로맨틱한 첫날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통새우 구이? 맥주? 미역국이 짱이었다. 소금간이 적당하게 된 따뜻한 미역국을 맛 본 순간, 이 비싼 돈을 내고 이 호텔에 묵게 된 결정이 새삼스럽게 자랑스러워졌다. 피로와 걱정으로 가득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맛. 나는 단연코 내가 먹어본 최고의 미역국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최고의 미역국과 함께 우리는 뻗었다. 로맨틱이고 뭐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저녁 여덟 시까지 일한 두 사람에게는 수면욕만이 존재할 뿐이니.
신혼여행 때의 사진을 보면 내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결혼식 날 사진에서 보이는 피곤한 웃음과는 질적으로 비교되지 않는, 순도 100%의 행복. 그러나 그 행복은 다시 행정적인 문제와 마주칠 때 와장창 깨진다. 신혼여행이 끝난 신혼부부에게 기다리고 있는 첫 번째 관문. 이바지.
원래는 이바지 음식을 따로 맞출까 하다가, 너무 가격이 비싸서 방향을 돌렸다. 신혼여행을 가기 전 과일과 고기 한 박스 x 3세트를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미리 사 두고,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인천공항으로 배달받기로 했다. 낮 열 두시에 공항에서 만나 트렁크를 과일과 고기로 꽉 채우고 근처에서 떡을 사고 찜질방에 가서 샤워를 했다. 첫 인사라 한복을 입었는데, 고름을 매는 방법을 몰라 쩔쩔 매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깔깔깔 웃으며 모양을 잡아 주셨다. 왠지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머님네 집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멀리 있는 아버님네 집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흔에 가까운, 나와 60년의 세대 차이가 나는 마르고 강퍅한 저 할아버지가 무서웠다. 어둠에 쌓인 무서운 존재 같았다. 들어서 선물을 드리고 인사를 하는데 아버님이 선물을 꺼내 주셨다. 책 두 권과 큰 액자 하나. 나에게는 똑게 육아를 주시고, 오빠에게는 아내에게 잘 하는 법에 대한 책을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를 낳을 마음이 명확하지 않았던 터라 기분이 씁쓰름했다. 하지만 첫 결혼 선물이 책이라는 건 좋았고, '똑똑하고 게으른' 양육이라는 것도 괜찮아서 결과적으로는 중립의 마음이 되었다.
액자에는, 소위 어른들이 퍼다 나를 만한 블로그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아버지를 향한 존경이 가득한 곳이 곧 집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아래에는 우리 부부가 이것만은 꼭 지킨다! 는 십계명이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버님이 직접 쓰신 것 같았다. 바람을 피우지 말 것, 서로 존중할 것, 성을 기피하지 않을 것.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나는 아직 유부녀가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터라 아버님이 주신 액자에 성 관련 이야기가 있다는 게 낯 뜨겁고 민망했다. 화가 많이 났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참았다.
그리고는 같이 아버님의 시골에 내려가, 할아버님의 무덤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그 항구도시를 좋아했지만 아버님과 함께 그 먼 곳을 가게 된다는 게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오빠가 중간에서 딱 끊었다. 거기를 제가 왜 가요. 아버지 혼자 다녀오세요. 안 가요. 오빠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님에게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이러다 싸움이 나지 않을까 무서웠지만, 안 가도 된다는 오빠의 말에 안심이 됐다. 그때는 몰랐지, 아버님의 그 말이 나에게 숙제처럼 남을 줄은.
아버님과 나가서 연포탕을 먹었나, 한 시간 반쯤 되는 그 시간 동안 아버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하고 또 하셨다. 할아버님의 무덤을 이장하고 싶다는 이야기. 어머님에 대한 욕. 어머님에 대한 화. 선원으로 배를 탔던 이야기. 죽을 뻔하셨던 이야기. 동생이 돌아가신 이야기. 한, 한, 한.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그 주파수에 접속이 되어서, 그 사람의 보내는 주파수에 따라 몸과 마음이 출렁출렁 움직인다. 아버님의 이야기는 진폭이 너무 커서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모두 어렵고 힘들고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아버님이 마지막 숟가락을 놓으시기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식당을 나왔을 때에는 환호라도 하고 싶었다.
아버님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마지막은 우리 집. 이제 출발한다고 집에 전화를 하니 아빠가 집 근처 절에 좀 들렀다 오라고 하셨다. 가서 할아버지 신주(?)에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왜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버지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라는 걸까. 나는 일단 대충 얼버무리고 끊고 절이 문을 닫았기를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오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친정 집으로 바로 갔다.
이미 아버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온 터라, 엄마는 간단한 과일만 준비해 주셨다. 우리가 준비한 과일과 고기와 떡 한 상자를 놓고 두 시간 정도 수다를 떨다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올 때 이상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몇십 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아무리 밖에 즐거운 것이 있더라도 결국은 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 도착지가 여기가 아니구나. 내 방의 문을 잠그고 오빠와 통화를 했고, 가끔은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카시아 향을 맡기도 했고, 밤 12시만 되면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미친 고딩들에게 소리도 지르곤 했는데 이제 내 집은 여기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나의 신혼집.
내가 결혼을 했다니, 남편이 있고 친정이 있고 시댁이 있다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혼하고 1년은 파란만장하다던데, 나는 자신만만했다. 우리는 6년 넘게 연애를 하는 동안 별로 싸우지 않았다. 결혼해서 같이 산다고 해서 뭘 그렇게 다를까. 기껏해야 갈비살과 등심의 맛 차이 정도겠지.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연애가 후추라면 결혼은 스테이크라고. 연애가 삶을 더 즐겁게 만들어 주는 조미료라면, 결혼은 굽는 시간 1분의 차이로 최고와 최악이 첨예하게 갈리는 프로의 세계라고.
그리고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아마추어 1은 와장창 깨졌다. 바야흐로 어버이날이었는데, 나는 아버님에게 와장창 깨지고 엉엉 울고 오빠는 아버님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여운 기억이지만 그때는 정말, 지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