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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Aug 08. 2021

시어머니가 객관적으로 나쁜 분은 아니지만 -2-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치맥 앞으로 가라 치느님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전화를 강요하는 어머니 때문에 화가 나서 아무 것도 못하고 앉아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어머니 때문에 기분이 나빠야 하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선의로 무언가를 드리면, 더 큰 선의로 무언가가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유, 인정... 뭐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의 인정을 꼭 받아야 하나? 왜?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으면 내 인생이 대단히 달라지나? 그건 아니었다. 나는 자고로 시댁이란 직장과 비슷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친해질 수도 있고 가끔 운이 좋으면 절친을 만날 수도 있으나, 비즈니스적 사이라는 것을 서로 까먹는다면 시망똥망이 되는 관계. 적정한 수준에서 대충 사이 좋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적당히 돌려까면서 유야무야 지내는 그런 관계 정도로 지내면 좋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내 가족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그게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다. 나는 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나. 이 시간에 차라리 치킨 한 조각을 더 뜯는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삭하게 튀겨진 옛날 통닭을 시켰다. 냉장고에서 이틀간 최상의 온도로 숙성된 맥주를 꺼내며 생각했다.


나는 그냥 내 쪼대로 살자.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겠다고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서 해다 바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래봐야 내 손에 남는 게 없었다. 있다면 씁쓸함 뿐. 씁쓸한 맛이 좋다면 그냥 흑맥주나 사먹으면 되지 뭘 굳이 그걸 또 인간관계에서...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여러 번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내 안에서 근본적인 무언가가 바뀐 것 같았다.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어머니를 관찰했다. 아, 어머니는 지금 옆에 친구 분이 계셔서 쎈 척을 하고 싶으신 거구나. 아, 지금 굉장히 불안하시구나.


상담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내, 어머니가 왜 정기적인 안부 전화에 집착하시는지 여쭤봤다. 분리불안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답변이 왔다. 오빠의 이복 남매들과 사이가 안 좋으신데, 그것 때문일까요? 그 분들을 포함해, 어머니의 부모님과 전 남편들과 기타 등등. 모든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마음일 거라고 하셨다. 그렇구나, 어머니의 화에서는 늘 불안이 느껴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불안이 넘쳐나는 사람이라, 타인의 불안이 잘 느껴진다. 어머니는 여러 종류의 불안을 떠안고 사는 사람이다. 애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쩌지, 애들마저 나를 버리면 어쩌지. 어떤 불안한 사람들은 내가 안고 있는 불안이 너무 괴팍하고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저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변한다. 내가 지금 불안한 건, 네가 무언가를 했거나 안 했기 때문이야.


"내가 불안한 건, 그러니까 너 때문이야"

갑상선 수치 때문에 회사 내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내 수치는 그렇게 나쁜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검은 한 번 필요한 정도였다. 내가 불안해하니 의사 선생님은 나를 안심시키며, 피검사는 대형 병원으로 보내니 내가 중간중간 확인해서 혹시 빨리 나오면 당일에라도 수치를 알려주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일에 병원에 연락하니, 너무 바쁘셔서 오늘은 안 된다고만 하셨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그 때는 그렇게 친절하게, 나를 위로하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뭐 큰 일이라고. 나는 이렇게 불안한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평온하고 무심한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불안을 저 사람이 위로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내가 불안하다고 해서, 저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희생해서 나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아, 내가 불안하다고 해서 사람들을 여러모로 많이 괴롭혔구나. 하는 반성이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정해진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고, 수치는 더할 나위 없이 정상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비슷한 시간에 전화가 오지 않으면 너네가 싸우지는 않았을까 너무너무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걱정이 되기 때문에 화가 난다고도 하셨다. 그 때 알았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그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에 얽매인 것처럼 전화를 드릴 필요는 없다는 걸.


어머니한테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전화를 정기적인 시간에 드리다 안 드리니 서운하셨죠? 그런데 숙제하는 기분이어서요. 이제는 어머니, 제가 드리고 싶을 때 편한 마음으로 드릴게요. 날짜나 시간 정해두지 않고요. 한 달에 한 번이 될 수도 있고, 이틀에 한 번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상담을 받다가 알게 됐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었다는 걸. 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있고, 엄마는 팔짱을 끼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고, 그런 엄마에게 욕먹고 싶지 않아서 기를 쓰고 긴장해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마음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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