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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Jul 16. 2023

돼지감자와 감자 돼지의 행복

이렇게나 시시껄렁한 농담의 모음

 그날은 유독 남편이 얄미운 날이었다. 내 말을 조곤조곤 다 받아치면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말씨름이 시작됐던 주제는 희미해지고, 그저 문장만 무의미하게 쌓이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래도 감정을 함부로 표출할 순 없었다. 만 0세인 우리 아이가 대화를 다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니, 갑자기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됐어. 돼지감자야.”


 논리는 없다. 그저 그 순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타격감 있는 단어 두 가지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내뱉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실제로 남편의 머리 스타일이 약간 감자처럼 생기기도 했. 최근에 살이 좀 오르기도 했고. 아니, 애초에 논리란 없으니 설명하는 건 과정보다. 그리고 자기가 뭐라고 할 것인가. 돼지감자가 나쁜 말도 아닌데.


 역시 남편은 잠시 움찔했다. ‘어떠냐, 생각지도 못했지?’ 남편이 조용해진 덕분에 화가 훅 내려갔다. 나름 잘 이겼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다가와 말했다.


“그럼 넌 감자 돼지.”


 “감자 돼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일단 웃음이 터졌다. 그냥 내가 내뱉은 말의 앞, 뒤를 바꿨을 뿐인데 나를 무력화시다. 그러면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순수한 감탄이 터졌다. “어우, 왕년에 언어 공부 깨나했다더니, 놀라운데.” 하지만 둘이 시원하게 웃고 나서야 내가 졌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돼지감자는 있는 말인데, 감자 돼지는 뭔가 겨냥하고 만든 말이잖아....” 그의 말은, 최근에 내가 감자를 맛있게, 많이 먹은 사실과 겹쳐지며 더욱 사실적으로 들다. 유유히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으.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엎어치기 한판승!



 남편과의 시시한 대화에서 웃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리 집에는 모기가 매일 밤 1~2마리씩 발견됐다. 나는 운동을 하느라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남편에게 전기 파리채를 쥐어주며 말했다. “여보, 여보는 이제부터 모스키토 헌터(모기 사냥꾼), 줄여서 ‘모터’야. 알겠지? 임무가 막중해. 아기 방이랑 안방을 돌면서 모기가 있는지 확인하고 잡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웃음을 애써 참으며 역할을 부여했는데, 그는 진지하게 전기 파리채를 받았다. 그리고 한동안 성실하게 집 안을 돌며 모기를 잡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엄청 웃겼는데, 나중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그는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매일 보는 사람에게 하기 힘든 말을 용기 내 했다. “덕분에 나와 아이 모두가 모기에 안 물리고 잘 자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워.” 그는 쿨하게 답했다. “나도 안 물리려고 하는 건데, 뭐. 그리고 재밌어, 나름.”


 장마가 시작되면서 모기가 안 보이자, 모터라는 별명도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애틋한 마음도 흐릿해졌다. 이 모든 걸 다시 불러온 건 또 시시껄렁한 이야기였다. 난 또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아이를 재우기 위해 아무 노래나 불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가 내 근처에 다가와 말했다. “이제 모기가 없어서 ‘모터’는 할 일이 없습니다. 대신 날파리가 많으니 ‘날터’가 됐습니다. 날파리는 작기 때문에 잘 안 보여서 제보가 절실합니다.”


 딴딴딴딴... 진짜 제보를 해야 할 것 같은 배경음악을, 그는 입으로 진지하게 내며 전기 파리채를 들고 있었다. ‘뭐지. 이게 뭐지.’ 어리둥절함도 잠시, 웃음을 참고 마침 눈앞에 알짱거리던 날파리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아, 감사합니다.” 파삭! 그는 신나게 전기 파리채를 휘두르고는 혼잣말을 했다. “이야, 저 작은 것도 잡히네. 이거 대단한데.”


“프, 푸하하하하!!” 졸린 눈으로 있던 아이가 ‘이-잉’ 투정을 부려서 얼른 웃음을 참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집 ‘날터’의 모습을 봤다. 그는 아이를 달래며 또 진지하게 날파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돌아서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입모양으로 묻는 그의 말에 픽 웃으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웃겨. 그리고 왜 저렇게 맨날 쓸데없이 진지한 거야?’



 행복이 뭘까. 오랜만에 우리 집에 찾아온 헌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시시껄렁한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돼지감자와 감자 돼지는 같이 살아서 서로의 시답지 않고, 미덥지 않은 순간을 자주 목격한다. 화가 날 때도 많고, 서로에게 좀 고치라고 소리도 지른다. 하지만 또 많은 순간에 우리는 서로의 헐렁함에 웃으며 다음 농담을 준비한다.


 행복은 이렇게나 시시껄렁한 농담의 모음집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웃고 나면 앞으로도 저 사람과 어찌어찌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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