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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융 Oct 11. 2019

파리에서 집 구할땐 이력서가 필요하다



집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큰 일이라는 것을 부모님과 살 때는 몰랐다. 한국에서는 자취를 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통금이 존재하는 삶을 살았고 그랬기에 늘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그러잖아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오게 되었을 때 드디어 혼자 살 집을 구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숱한 좌절과 체념으로 좁히고 파리에서의 첫 집을 구하게 되었다.


흔히 프랑스인들이 집을 구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seloger.com, pap.fr등에는 싸고 괜찮은 집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월세 제도는 한국과 달라서 보증금이 월세 1 개월치 정도로 적은 반면, 수입 보증을 해야 한다. 본인이 월세 3 배 정도의 수입이 있거나, 그 정도 수입이 있는 (보편적으로 '현지')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 즉, 외국인 유학생인 나는 한국인 부모님 외에는 현지 보증인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재정 증명을 하여도 인정되지 않아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1) 첫 번째 집

냉엄한 현실을 마주하기 전 꿈꾸었던 파리의 이상적인 집은 다음과 같았다.

- 센느강 주변

- 가격은 800유로 부근

- 채광이 좋고 깨끗할 것

- 환승 없는 통학 30분 거리

- 역에서 가까울 것


하지만 예산 내에서는 저런 집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집은 결국 현지 부동산에서의 숱한 거절 후 프랑스 한인 사이트 ‘프랑스존’에서 구했었다. 이력서 넣듯 문의 메일을 여러 군데 넣고 그중 가장 먼저 연락 온 집을 방문했는데 내가 원하던 지역은 아니었고 집도 자그마했지만 학교에서 딱 삼십 분 거리이고 역에서 가깝고 채광도 좋은 편이었다.


첫번째 집에 살면서 많은 추억들을 쌓았다. 서향으로 난 주방의 창으로 매일 환상적인 노을을 볼 수 있었고, 오래되었기에 고풍스러운 오스마니 안 스타일의 장식 몰딩이 되어있어 프랑스인 친구들도 예쁘다고 인정했었다 (나는 뭔가 노출된 대들보가 있는 식의 스타일을 내심 원했지만). 7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분리형 원룸이어서 혼자 생활하는 데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고 치안이 좋아 더운 여름밤에는 창을 열고 자도 안심이 될 정도였다. 또한, 대형마트나 식료품점, 영화관, 심지어 자라까지 활발한 상권의 옆에 위치한 한적한 동네여서 난생처음 단골 빵집과 미용실을 만든 동네이기도 하다. (단골이라는 것은 참으로 좋았다!)  

다만, 오래된 건물이어서 외풍이 심해 한겨울은 거의 반 야외나 다름없었으며 (자다가 추워서 깨본 적 있으신 분은 이 기분을 이해하실 듯...) 빌트인 된 가구들은 새하얀 벽과 아주 강한 대비를 이루는 짙은 갈색이어서 상대적으로 방이 더 좁아 보였다. 그리고 전 세입자는 한인 남학생이었다는데 게으른 골초였는지 냄새와 찌든 때가 상상을 초월했었다. 하지만 최종 보스는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중개인의 중요성

이외수가 드랙퀸이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은 범상치 않은 첫인상의 한국인 중개인 덕분에 삶의 지혜와 가르침을 얻었다.

사람은 무조건 첫인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과 나의 쎄한 촉은 틀리지 않는다는 것.

영업직이 괜히 정장 입고 멀끔하게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프랑스 부동산과 다르게 3개월치 보증금을 요구했었는데 이를 돌려받는데 거의 1년 가까이가 소요되었었다. 알고 보니 그 중개인은 과거에도 한인 커뮤니티에서 정지 먹은 전적이 있었으며 진행 중인 민사소송도 여렀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결국엔 프랑스 변호사를 선임하여 보증금을 11개월 만에 돌려받게 되었다. 물론 큰돈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은 돈도 아니었으며 그동안 이런 식으로 유학생들의 속을 썩여온 것을 보니 더욱 괘씸해서 악착같이 돌려받았었다. 전기세도 못 낸다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던 그는 최근에 우연히 접한 소식으로는 아직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다고.


2) 두 번째 집

두 번째 집은 학교 프랑스인 친구가 한국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4개월간 임시로 저렴하게 빌리게 되었다.

감각적인 친구의 인테리어와 학교에서 훨씬 가까운 위치 덕에 반해서 냉큼 계약했고 첫 한 달간은 진짜 파리지엔의 집에 사는 기분에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 집은 일체형 원룸에 화장실도 좁은 가로로 긴 사각형의 집이었는데, 남향으로 난 큰 창 덕분에 채광이 참 좋고 건물 내부에 정원까지 있는 참으로 예쁜 집이었다. 바로 옆에 경찰서도 있어서 치안은 더더욱 안심이 되고 재래시장도 가까워 신선한 과일을 더 자주 사 먹게 되었었다. 나름 유명한 거리의 바로 옆 골목이어서 연남, 망원, 성수 같은 핫플에 살면 이런 기분일까? 싶은 기분으로 매일 들떠있었었다.


하지만 웬걸, 그 집에서는 한 달 만에 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길가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쥐가 집 안에서 활보하고 있었다.

사실 유학 오고 가장 처음 잠시 머물렀던 마레 지구의 친구 집에서도 쥐는 나왔었다. 하지만 그 집은 분리형 원룸이어서 문을 닫으면 적어도 잠자리는 확보되었었다. 하지만 이 뻥 뚫린 집에서는 내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이 집은 어느새 쥐들 사이의 핫플로 소문이 나버렸고, 하루 이틀 나오고 말겠지 했던 쥐는 매일 밤 활발히 돌아다녔다. 알고 보니 쥐들이 건물 내에서 집들을 이 곳 저곳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옆집에 물어보니 몇 개월 전에 나왔었다며 집주인과 얘기해보라 했지만, 친구를 통해 해당 사항을 전달하여도 집주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물론 에펠탑 주변에서 보던 팔뚝만 한 들쥐는 아니고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의 생쥐이긴 했지만 다 필요 없고 침대 위를 기어가는 그림자를 보고 질겁한 순간 이후부터는 쥐 소탕 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그렇게 쥐들을 네다섯 마리 잡고 나니 부스럭 소리만 나면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결국 두 달 만에 계약을 파기하였다. 그때 재워줬던 친구들, 진짜 생명의 은인들(찌잉)


3) 세 번째 집

쥐의 악몽을 잊기 위해 한국에서 잠시 휴가를 보낸 후, 친구의 친구의 집에 단기 임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파리 생활이 2년이 지나가니 친구들을 통해서 덕을 많이 보았다. 고마운 친구들.

이 집은 학교까지는 조금 멀었지만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신식 아파트였고 창문으로는 무려 에펠탑이 보이는 집이었다. 그간 지냈던 집 중에 가장 넓고 화장실과 주방과 방이 각각 문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창도 각 방마다 크게 있어서 채광이 좋다 못해 투머치였다. 이 아파트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살았는데 특이하게도 반층을 올라가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어서 어르신들의 짐을 꽤나 자주 옮겨드리고 예쁨 받았었다.

내가 보았던 유기농 마트 중 가장 큰 마트가 집 앞에 있어 한 달간 머무는 동안 건강한 유기농 식생활을 하였고, 아몬드 우유에 눈을 뜬 시기도 이쯤이었다. 에펠탑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혼술 하면 어찌나 좋던지!

한 달만 머물렀기에 거창한 기억은 없지만, 유학생활의 마무리를 하기에 충분히 좋은 집이었다.


4) 집이 될뻔한 집들

두 번째 집에서 지내며, 학교에서 마음이 맞았던 친구와 룸메이트를 하기로 결심하고 한동안 같이 집을 보러 다녔었다. 프랑스인과 집을 구하면 계약이 쉬울 줄 알았는데 아주 큰 오산이었다. 월세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파리는 집을 보러 갈 때 면접 보듯이 준비서류를 전부 구비해가야 하는데, 모두가 멀끔한 차림(심지어는 정장)으로 와서 이력서를 준비하듯 두툼한 서류 뭉치를 집주인이나 중개인에게 건네곤 했다. 그리고 개중 위치가 좋고 저렴한 집들은 선착순으로 방문자를 끊는데 그게 50명이 넘었던 적이 부지기수이다. 50명의 사람들이 집 앞 계단, 건물 바깥 골목까지 줄을 서있는 장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인파가 차례차례 계단을 올라 집을 신속히 구경하고 두툼한 서류봉투를 제출하고 집주인의 간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현지 직장인과 수입 없는 학생 2의 경쟁은 당연히 참패로 끝났고, 결국 우리는 스무 군데 이상의 집을 방문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한 끝에 룸메이트 플랜을 포기하였다.


5) 친구들의 집

파리에서 가장 처음 머물렀던 친구의 집은 마레 지구 한가운데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대들보와 벽돌이 드러난 노출 구조에 방도 사다리꼴인 독특한 방이었는데 버려질뻔한 구석 공간도 DIY 옷장으로 활용하는 등 친구의 감각으로 한층 어여뻤던 집이었다. 감각 좋은 그 친구는 집을 참으로 멋들어지게 꾸몄는데 그녀의 집은 쥐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너무 예뻐서 파리에 대한 로망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그다음에 머무른 집은 지하철역 종점에 위치한 다소 외진 지역 (그 당시엔 외졌는데 지금은 세상 힙해진 13구)의 분리형 원룸이라 부르기엔 거실까지 있는 다소 큰 집이었는데, 역시 예술에 조예가 깊은 집주인 덕에 빈티지 포스터, LP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방은 11자 구조여서 두 명이서 앞뒤로 식사 준비가 가능했으며 메인 창이 두 개여서 채광도 좋고, 집 옆에 경찰서가 있어 치안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경찰서 주변과 인연이 깊은 듯하다)


건축가인 집주인은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 수십 년이 넘은 빈티지 카메라도 전시해 놓았었는데 정말 아이템 하나하나가 다 감각적이었다. 11자형 주방의 편리함을 처음 깨달은 집이기도 하였고, 인터넷에 흔히 보이는 라탄, 그린, 내추럴과 같은 유행 인테리어가 아닌 정말 개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난 집이어서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 깊은 집 중 하나이다. 나는 2019년에야 빈티지 포스터에 눈을 떴는데 실은 이미 그때부터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미니멀한 vertigo의 빈티지 포스터는 집의 분위기와 찰떡이었다.


물론 친구들의 집이 모두 다 상술한 것처럼 감각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감각적이며 개성 넘쳤다.

한국은 뭐랄까, 결혼하기 전의 거처는 거의 임시숙소의 개념에 가까웠었고, 이제야 1인 가구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립이 되어 폭발적으로 셀프 인테리어 시장이 발전하는 반면 (고마워요 오늘의 집, 마켓 비!), 프랑스는 모두가 월세로 살지언정 '나만의 공간'이라는 표시는 확실하게 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는 외식이 원체 비싸 다들 집순이, 집돌이가 될 수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집을 꾸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귀국해서도 계속 독립해서 지내는 중이고, 그렇기에 나만의 공간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럴 때 파리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집' 들에 대한 기억이 큰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집들을 옮겨 다니고 정착하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 탐험이 내심 기다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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