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융 Oct 03. 2021

1. 프로포즈

프로포즈와 프로포절 그 사이

본디 결혼에 큰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뜻이 있었다면 여느 입사동기들처럼 20대 중후반에 소개팅 수십 번 해서 서른 넘기 전에 갔겠지.

그냥 나와 같은 방향을 질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사람과 평생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면 해도 나쁘지 않겠네, 정도의 생각이었다. 엄마는 내가 비혼주의자인줄 알지만, 난 혼자보다 둘을 좋아해서 옆에 여자든 남자든 1명은 두고 살 심산이었지롱.


여하튼, 그런 가치관을 이해하고 만나던 친구와 떠났던 2019년 겨울의 발리.

그는 북쪽의 유명한 렘뿌양 사원에 가는 프라이빗 투어를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한다며 부산스러웠다.

무리하지 않는 여행이 테마였건만 꼭두새벽부터 움직이는 것이 고되어 오만상을 찌푸리며 끌려가다시피 나왔는데, 아침 여명에 몽글거리며 빛나는 안개 낀 논밭과 정글들을 보니 어느새 잠이 쏙 달아나고 사방의 풍경을 눈에 담기 바빴다.

렘뿌양 사원도 살구빛 같은 아침 빛깔이 번져가서 더욱 신비로워 보여서 잠 덜자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렘뿌양사원 포토스팟의 비밀은 가본 이들만 알지)

사원을 다 돌고 내려가던 와중, 사원 입구에서 갑자기 뒤돌아보라던 그. 이어서 나의 목에 걸리는 합격, 아니 프로포즈의 목걸이. "나와 결혼해줄래?"


그러니까 영화에서 남주가 무릎 꿇고 반지 케이스를 뙇 열고 여주가 울면서 '예쓰!' 하며 얼싸안는 이런 장면들은 많이 보았지만, 실생활 버전에서는 양 당사자가 혼인을 합의한 후 식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형식적인 행사 정도로 격하된 프러포즈인데... 이 친구는 진짜로 서프라이즈 프로포즈를 준비한 거다.

분명히 여행 준비 같이하고 내가 짐도 본 것 같은데 이걸 어디에 숨겨왔지?? 언제 준비했지?? 아니 그것보다도 갑자기? 말도 없이? 이렇게?


솔직히 말하면 당황함이 먼저였다.

정말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였기 때문에 놀랠 노자였기 때문.

'가치관 존중한다더니 순 거짓부렁이었구나' 하는 억하심정이 들 뻔하기도 했으나, 그는 이어 말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말해달라. 기다리겠다.'

왜 기한도 없는 프로포즈를 했을까, 라는 의문을 지금 이 글을 쓰며 곱씹어보니 어디 영업 사원 아니랄까 봐 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로 본격 선언을 했던 것 같다. (이젠 나도 영업직무를 하여 이해해버리고 만 것이다)

프로포즈의 본래의 정의에 따라 충실히 '제안'을 완료한 그는 이내 나의 대답을 기다렸고, 나 역시 '좋다. 하지만 말한 대로 내가 준비가 되는 그때 하자'라고 제안했다. 목걸이는 마음에 쏙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프로포즈 이후 2년 8개월가량 지난 올해 10월, 우리는 결혼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