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하고 질서정연한 이빨, 글자, 그리고 권력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이빨은 인간의 권력을 상징한다
"이빨은 인간의 권력을 상징한다." 엘리어스 카네티Elias Canetti가 무리와 군중이 보이는 병리 현상에 관하여 훌륭한 담론*을 펼치며 적었던 문장이다.
"이빨의 특징은 매끄럽(간결함)고 가지런하다(질서)는 것이다. 그런데 매끄럽고 가지런하다는 것은 권력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만사가 매끄럽게(잘) 돌아간다" 든지 "매끄럽게(순조롭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은 우리가 방해받지 않고 어떤 일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사는 집과 벽, 그리고 집 안에 들여놓은 모든 물건조차 매끄러워졌다(단순해졌다)...... 요즘엔 장식과 무늬를 구린 취향이라 여기며 깔본다......" -엘리어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中
마셜 맥루헌 Marshall McLuhan은 <문자 언어The Written Word>라는 논문에서 “이빨은 가지런한 정렬만큼이나 단연코 시각적이다.”라고 말한다. “글자도 이빨처럼 가지런하고 시각적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제국을 세우는 사업에 이빨을 심었던(즉, 제국을 탄생시켰던) 글자의 힘은 서구 역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알파벳에 관한 그리스 신화는 카드모스 왕 이야기로 용의 이빨을 땅에 촘촘이 심어 그곳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솟아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알파벳을 쓰기 전에는 지식을 얻기 위해 수많은 기호를 외워야했다. 게다가 그런 글은 들고 다니기도 힘든 돌이나 벽돌 위에 썼기 때문에 필경사가 권력을 독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훨씬 배우기 쉬운 알파벳과 가볍고 들고다니기 쉬우며 저렴한 파피루스가 등장하며 권력은 승려 계급에서 군인 계급으로 넘어갔다. 카드모스 왕과 용의 이빨에 관한 신화에는 승려 계급과 도시 국가는 몰락하고 군인 관료와 제국이 대두했던 역사를 함축한다." -마셜 맥루헌, <미디어의 이해> 中
위 단락을 읽으며 눈치 챘 듯이, 당신이 이제 곧 읽게 될 글은 이빨에 관한 비유 투성이다. 이 글의 전제는 글자가 특정한 서체나 자족으로 만들어질 때, 글자가 권력의 대행자가 되고 권력자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서체는 권위적인 규칙을 표방하며 자유를 위한 생각과 행동을 좀 먹는다. 정반대로, 어떤 서체는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서체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쓰이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다.
'글자-권력-군대-이빨'이란 상징 체계는 그리스 신화 ‘카드모스 이야기’에 기원합니다. 페니키아 왕자인 카드모스는 제우스에게 납치된 에우로페의 오빠였습니다. 카드모스는 신탁을 받아 용을 죽이고 용의 이빨을 뽑아 땅에 심었습니다. 그러자 땅에서 용아병이 솟아나고 그들끼리 전투를 벌이고 5명이 살아남습니다. 카드모스는 그 5명과 함께 그 땅에 테베를 건국했으며, 처음으로 테베와 그리스에 페니키아 문자를 전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면 한 번 다음 문장을 곱씹어보자. *<서체는 언어의 앞니이다.> 실제로 맥루한은 “타이포그래피는 그 자체로 큰 소리를 표현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도구를 만들었다...... 볼드체(굵은 서체)라는 도구는 강렬한 표현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앞니가 가지런한 이빨 맨 앞에 있기에 전체 이빨의 인상을 결정짓듯이 서체도 전달하고자 하는 글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는 걸 의미하며, 동시에 글자에 담긴 권력의 핵심임을 나타냅니다.
모든 서체는 권력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서체는 권력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서체는 생각을 여기 저기 실어 나르기도 하고 때론 사방에 동시다발적으로 전파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서체 대다수는 중립적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그 자체로는 어떤 고유한 이념을 담지 않는 투명한 “수정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서체는 독단적인 신념이나 교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제3제국(1933-1945년, 히틀러 치하 독일)이 찬미했던 게르만 블랙 레터 ‘프락투어Fraktur’체는 나치에게 “이상적인 게르만족 서체”라 여겨져 사용되었던 만큼, 히틀러가 인류를 상대로 벌였던 범죄가 떠오르는 매개체라는 시선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테다. 잔인할 정도로 유대인을 배척했던 나치 주간지 <돌격병Der Stürmer> 발행인란의 뾰족한 프락투어체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프락투어체가 얼만큼 사악한 상징이었는지 느낄 수 있을 테다.
수정잔에 대한 비유는 미국 작가이자 타이포그래퍼였던 베아트리체 워드Beatrice Warde가 쓴 <수정잔, 왜 타이포그래피는 눈에 잘 띠지 않아야 하는가, 1955>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좋은 타이포그래피는 쓸데 없이 멋부리기보다 글에 함축된 의미가 투명하게 잘 드러나도록 모습이 눈에 잘 띠지 않아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권력 냄새를 풀풀 풍기는 서체는 명령하거나, 지시를 전달하거나, 법령을 공표한다. 그리고 이런 서체는 결국 인간의 행동을 좌우한다. 이처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선택한 서체는 단순히 미적으로 고민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강제로 멈춰 서거나 나아 가게 하고, 보거나 듣게 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하고, 뭔가를 읽게 하려는 수단인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순종하길 바라는 서체는 실제로 권력을 쥐었던 상징의 특징을 갖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권력을 쟁취한다.
☞ 2부에서 계속..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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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