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대로 사람을 움직이는 타이포그래피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강렬한 서체는 강력한 효과를 원하는 사람의 소원을 곧잘 들어준다
정부, 교회, 그리고 각종 기관을 위해 만든 서체는 세상에서 제일 도드라지고 강렬해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권력을 휘두르는 서체란 배려 없고 야만적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서체는 자신의 의도를 속삭이며 들려주기보다 고래고래 소리질러 알린다. 애매모호한 건 절대금지다! 대중을 선동하려는 국가주의적 프로파간다가 정부와 국가의 강대함을 나타내려고 커다란 볼드체를 즐겨 쓴다는 얘기는 십중팔구 들어맞는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I Want You!”라고 외치는 미국의 유명한 1차대전 모병 포스터를 약간만 바꿔 따라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독일, 미국, 러시아 등 각 나라에서 차용된 엉클 쌤 포스터 형식은 신문에서 쓰이던 “스크리머screamer” 헤드라인에서 비롯한다.
스크리머 헤드라인은 타블로이드 신문에 쓰인 “호외요! 호외! EXTRA, EXTRA!”나 카니발 축제 포스터에 쓰인 “이리 오세요! Step right up!” 같은 표현을 일컫는 용어이다. 강한 힘이 담긴 서체는 그저 힘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강렬한 서체는 서비스나 상품, 어떤 것이든 팔아 치우는 데도 완벽하다. 아무튼 강렬한 서체는 강력한 효과를 원하는 사람의 소원을 곧잘 들어준다.
(1) 스크리머 screamer 는 독자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는 헤드라인 형식으로 본문에선 엉클 쌤에 비유해 ‘소리치는 사람’이란 중의적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2) 타블로이드 신문 tabloid 은 보통 신문의 절반 크기로 흥미 위주의 짤막한 기사에 유명인 사진을 싣는 신문입니다.
여러가지 서체와 손글씨는 입에 발린 말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이 있다.
1924년, 독일 화가이자 평론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콜비츠의 아들은 1차대전 초기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는 한 청년이 크레용으로 쓰인 세 단어 사이로 한 쪽 팔을 쳐들고 저항하는 모습을 그린 “결코, 전쟁이 다신 없기를! Nie Wieder Krieg”라는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이 포스터는 당시 전쟁 재발을 경고했던 상징물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사실 이 포스터에 쓰인 글자가 활자체는 아니지만, 아무튼 강한 힘이 있어 보인다. 저항하려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글씨는 인류에게 야만적인 행태를 끝내라고 명령하는 듯하다.
같은 방식으로 무정부주의 잡지인 Fanal (1928)과 Resistance(1947)는 대중의 힘을 나타내고자 발행인란에 들어갈 글자를 손으로 휘갈겨 쓰거나 붓질로 그려 넣었다. 이런 점은 1932년 히틀러 선거 포스터에 을씨년스러운 ‘독재자big brother’ 초상 아래에 산세리프체로 ‘히틀러HITLER—I자 위에 정사각형 점이 그려진—’라고 써넣었던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서늘하고 기하학적인 산세리프체에는 강압적이면서도, 모순되게도, 현대적인 인간관을 펼치려는 건축가에게 있을 법한 권위가 있다.
여러가지 서체와 손글씨는 입에 발린 말을 선언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이 있다. 2차대전 시기에 다른 서체에 비해 월등히 많이 사용되었던 산세리프는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파시즘 지지자는 고전적인 로만Roman체를 즐겨 쓰다가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어진 “전체주의 모던fascist modern”체를 사용하는 쪽으로 태세를 전환한다. 속도와 진보를 상징하는 “미래주의futuristic” 서체들이 주문 제작되는 한 편, 고대 이탈리아 비석에 새겨진 글자에 영향을 받은 굵은 대문자 산세리프체가 생겼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에서 사용한 서체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목소리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닮았다. 파시스트 당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대중을 전체주의로 선동하려는 속내였기에 당 이념을 나타낼 구호를 만들어내는 건 중요한 전략이었다. 따라서 무솔리니는 대중에게 효과적인 글꼴을 만드는 문제를 놓고 곰곰이 연구해야만 했다. 그렇게 무솔리니는 자신의 선언을 전달할 용도로 현대적인 고딕체를 사용해 직접 웅변 하는듯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사용한 고딕체는 당시 전형적인 권력의 표상이었던 터라, 그의 적군들도 곧잘 고딕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도 무솔리니가 그랬듯이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에 빗대어 고딕체를 사용했다. 바보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권력끼리 싸우는 경우 적군을 상징하는 서체를 빼앗아오거나 도둑질 함으로써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서체를 빼앗는데 성공했다면, 새로운 소유자의 서체엔 등록상표처럼 고유한 시각 정체성이 생기지만 빼앗아 온 만큼 정체성이 약해지기도 쉽다.
(1) 미래주의futurism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사조로 속도와 기계, 진보를 찬미했습니다. 당시 유럽 열강에 비해 이탈리아가 산업화도 뒤쳐져있었다는 점을 비판하며 산업화가 완성된 미래도시를 유토피아로 삼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를 위해 점차 전통과 고전적인 체제를 파괴하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2) 파시즘fascism은 1919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창시한 대중 중심의 정치 사상입니다. 무솔리가 직접 파시스트 독트린(1932)에서'파시즘은 전체주의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처럼 파시즘은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며 사람은 집단(전체, 국가)에 속해서만 존재하는 의미를 찾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전체주의에 속합니다.
권력은 단순히 서체만 뜯어본다고 파악할 수 없는 주제다. 서체는 딱 전달하는 내용에 숨겨진 권력 만큼만 힘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나 권력은 점차 커지게 마련이고,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는 권력이 필요로 하는 대로 쓰이게 마련이다. 볼드체로 쓰인 충동적 선언문은 ‘권력의 방패’와 ‘저항세력의 창’ 중에 하나가 된다.
<글자와 권력> 마침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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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