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노hyono Feb 20. 2024

스타트업 표류기와 난파선

디자이너의 보잘 것 있는 에세이

<디자이너의 보잘 것 있는 에세이>는 제 일상의 기록을 담습니다. 보잘 것 없는 순간도 꾸준히 기록해 돌이켜볼 수 있도록 조금씩 적어가고자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예고는 없는 난파였다.


기회 잃은 표류기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희망과 조금 더 독기 가득한 성취욕으로 지난 1월에 첫 글을 올렸는데, 그새 내 일상에 지나친 변화가 생겼다. 만 3살짜리 회사에서 입사 3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고 말았다. 아쉽지만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록할 기회는 더는 없어졌다.


내가 에이슬립에서 보낸 3년은 한 해당 한 부씩 총 3부작의 표류기라 생각했다. 1부는 홀홀단신 그래픽 디자이너로 시드부터 시리즈 A를 버틴 2021년, 시리즈 B의 스케일업을 거치며 브랜드 팀이 꾸려진 2022년은 2부, 치명적인 경영난에도 BX팀끼리 의지하며 한 마음으로 고군분투 했던 2023년은 3부로.


'0에서 1을 만드는 곳'이 내가 스타트업에 대해 아는 유일한 한 문장이었기에, 용감하고 무모하게 공동창업자 6명이 넝마로 만든 뗏목에 새 동료로서 올랐다. 운좋게 좋은 동료를 만나 3년 동안 밤낮 없이 물이 차오르는 곳을 기우며 망망대해를 헤매었다. 이제서야 간신히 배다운 배를 만들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날 배는 난파되었다.


난파 그리고 생이별

아쉽지만 우리는 그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작은 성공과 성취로 끝맺고 싶었던 내 스타트업 표류기는 일리아드가 되었고, 난파선에서 떠내려가 버린 오디세우스처럼 예정에 없이 낯선 환경으로 떠밀려 새로운 표류의 막을 올렸다. 안타깝게도 내겐 신에게 선물받은 영웅의 영특함은 없으니, 그의 동료 A정도일까.


구조조정. 이 네 글자를 통보 받고 가장 고통스러운 건 BX팀이 뿔뿔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회사가 힘들다고만 알고 있었지, 바로 하루 전만 해도 에이슬립이란 프로젝트의 생존과 성공에 어떻게 기여할지 대차게 떠들던 BX팀이었다. 슬프게도 전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때, 구조조정은 전쟁처럼 우리를 갈라놓았다. 믿음을 다지고, 성장을 지켜보고, 서로 다름을 좋은 언어와 태도로써 맞춰온 이들과 하루 아침에 이별하게 되었다.


언제나 우리가 웃는 모습으로 헤어질 거라 생각했고, 그걸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바보같이 뱃머리가 날아갔는지, 아니면 배의 밑바닥부터 바닷물로 움푹 꺼지는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웃어보이려 했다. 그 와중에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남는 건 사람뿐이란 말을 믿고,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크게 남은 건 서로였다. 그럼에도 준비되지 않은 이별로부터 좋은 끝맺음을 함께 의논하기엔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에 날아간 어이를 되찾아오기도 벅찼다. 몇 주가 지나서야 모인 에이슬립의 BX팀의 끝맺음에 간신히 지은 웃음은 퍽 자조적일 뿐이었다. 우리끼리는 '연인에게 잠수이별 당하고, 몇 주간 혼자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날 면면들의 표정과 공기가 여전히 가슴을 후벼판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 우리는 끓는 물 분자가 진동하듯 치열하고 밀도 높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 건강히도 이 상황을 헤엄쳐 가고 있다. 난파선에서 좁쌀 한 톨 더 가지려는 밥그릇 싸움이나 전염병처럼 번지는 무례함과 분노에 휘말리지 않고, 다들 성실히 그동안의 기록을 정리하고 새로운 목적지를 찾고 있다. 우리의 끝맺음이 내가 바라던 바와는 달랐어도, 적당한 온도와 회복력으로 잔잔히 나아가는 모습에서 그들의 생기를 느낀다. 더는 일상을 함께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에이슬립의 BX팀이었던 이들에게 마음으로 기대게 된다.


비단 우리 팀뿐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성장해온 수십 명의 애정하는 동료 사이 좋은 어른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애정하는 이들과 치열하게 함께 꾸린 무대가 막을 내리는 걸 한 마음으로 보는 경험은 날이 갈수록 귀하지 않을까. 우리의 뼈아린 실패가 언제 어디선가 훌륭한 팀을 꾸리는 데 좋은 거름이 될테다.


아직은 이별의 슬픔이 시시때때로 온몸에 닭살처럼 돋아나는 때지만, 각자의 속도대로 상처가 아물 즈음 두 손에 웃음을 한껏 들고 서로를 찾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24. 2. 19  월요일

(커피챗 하고 돌아와 또다시, 부엌 테이블에서)

                    

작가의 이전글 다시,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