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며 강렬한 고딕체와 볼드체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권력은 구체성을 없애면서 생긴다.
물론, 글이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이고 서체는 그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이 ‘전령을 죽이지 말라not killing the messenger’는 관용구를 두고 뭐라고 말 했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러나 글자는 글(그리고 이미지)를 만나 글의 어조와 분위기, 무게를 결정짓는다.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지 표지판을 떠올려보자. 정지 표지판 하면 떠오르는 빨간색 육각형과 단단한 클리어뷰ClearviewHwy볼드체로 또렷이 적힌 '정지STOP'글자는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어느 문구든 정지 표지와 같은 방식으로 쓰면 똑같은 효과를 발휘할 만큼 영향력이 강하다. 예컨대, '정지' 대신 '시작'을 넣어보아도 영향력은 같을 테다.
'나쁜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을 죽이지 말라'는 서양의 속담으로 현대에는 사회 문제를 들추는 언론을 욕하면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의도로 쓰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90년대에 미국 레이건 정부의 부패를 폭로했던 기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국 정부와 CIA, 유력 언론사를 의미합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kill the messenger>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가 만든 유명한 —마치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널 보고있다> 포스터처럼 생긴—오베이Obey the Giant 로고는 이 주제에 딱 맞는 사례다. 오베이는 정지 표지와 같은 유형의 언어로 굵은 고딕체를 써서 더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확히 누구한테 복종obey하라는 건지는 몰라도, 오베이 로고의 고딕체는 사람들에게 명령에 따를 것을 강력히 피력한다. 비슷한 사례로 ‘경고’, ‘주의’, ‘금지’와 같은 단어도 심리적으로나 (말 할 것도 없이)언어적으로나 정지stop란 말만큼 강력하다.
그런데 ‘정지’, ‘복종’ 같은 단어가 보도니Bodoni, 가라몬드Garamond, 클라렌든Clarendon 체로 쓰여도 같은 효과가 있을까? 권력을 위해 디자인 된 서체에 세리프가 달려 있어도 될까? 육중한 슬랩 세리프는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획이 가느다란 세리프 서체를 쓸 경우에도 고딕체를 쓴 것처럼 사람들이 판단력이 약해지고 —권력이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종과 불복종의 차이 일지도 모르는—생각이란 걸 조금도 못한 채 명령을 듣게 될까? 권력은 구체성을 없애면서 생긴다.
“표음 문자는 독특한 기술이다.” 마샬 맥루한이 썼던 문장이다. “오직 알파벳 문화권만이 연속적이고 선형적인 배열 방식을 영적, 사회적 집단에 널리 알려진 방식으로서 숙달한 바 있다. 더 빠른 속도와 실용적인 형식을 위해 모든 사례를 균일한 단위로 분류하는 방식은 서구사회가 인류와 자연 모두에게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비장의 한 수였다.” 그리고 활판 인쇄술을 사용하게 되며 알파벳의 힘도 커졌으며, 인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이게 바로 우리 서양의 산업화 과정이 자기도 모르게 아주 군사적인 성격을 띠게 된 이유이다.” 마샬 맥루한은 확신에 차서 덧붙인다. “또한 마찬가지로 서양의 군사 계획은 아주 산업적이었다. 알파벳은 모든 상황을 균일하고 연속적인 패턴으로 재단해 뭔가를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기술로서 산업화와 군사계획 두 가지를 만들어낸 셈이다. 알파벳 문화권이 여러 현상을 획일적이고 연속적인 규격과 공식으로 담아내려는 특성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있었으며, 서양의 반복성과 획일성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판으로써 심화한다.”
필자는 맥루한의 글을 인용해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 문화권이 여러 현상을 보편적 규격이나 도량형으로 통일시키고 반복 생산하려는 성향을 근현대 군국주의, 산업화와 연결짓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활자가 글자를 일정한 형태와 규격으로 담아내며 같은 인쇄물을 반복적으로 찍어낼 수 있다는 점과 본인이 생각한 알파벳 문화권의 본질적 특성을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일반 대중이 널리 읽고 쓸 수 있게 될 즈음 인쇄술typography은 권위를 위한 도구가 되었고 대량 인쇄로 급증한 인쇄물은 권위가 요구하는 대로 부응했다. 이런 현상은 결국, 세계를 바꾼 일련의 사건들에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마샬 맥루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쇄술이 낳은 예상치 못했던 숱한 결과 중에서도, 민족주의의 대두는 그나마 있을 법한 일이었던 것 같다. 대중들이 토착어와 공통 언어권을 중심으로 정치적 단일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인쇄술이 각 지역 언어를 대규모 대중 매체로 담아내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이야기이다.”
☞ 3부에서 계속..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