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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노hyono Mar 16. 2020

파시스트의 미혹 (2)

무솔리니가 꾸었던 꿈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시인과 예술가, 영웅과 성인, 철학자와 과학자, 모험가와 이민자의 나라


독일의 총통이었던 히틀러Herr Hitler는 새로운 예술 양식을 배척했지만, 이와 달리 무솔리니는 잠시나마 이탈리아 미래파를 품은 적이 있다. 이런 모습에서 그가 히틀러보다는 더 진보적인 세계관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솔리니는 미래파 양식과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 로마식 거수 경례와 파시스트 문장emblem 같은 과시적 관습을 극찬하던 한 편으론 고전주의와 현대주의가 파시즘 속에 섞여 들도록 했고, 이는 지중해 양식이 발달하는 데 일부 기여하게 된다. 오늘까지도 남아있는 파시스트 양식에선 아직도 어스름하게 비치는 고대 로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미래주의를 기반으로 작업한 예술가 집단입니다. 속도와 강한 힘을 추구했으며 이런 속성을 지닌 기계와 최신 기술을 찬미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주변 유럽 국가에 비해 산업화가 느렸던 만큼, 미래파 작가들은 전위적인 태도를 지녔고 전통을 과감히 깨부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좌: 무솔리니와 히틀러, 1940 / 가운데: 파시스트식 거수경례를 받는 무솔리니, 1936 / 우: 파시스트National Fascist Party 엠블럼


나는 디자인 워크숍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한 주 정도를 로마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파시스트 정권의 파사드와 산 세리프로 새겨진 비문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았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고전주의 양식과 파시스트 양식을 짬뽕해 새긴 비문의 글자체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발하기도 한다.

에우르 건축물 상단에 새겨진 비문들은 "시인과 예술가, 영웅과 성인, 철학자와 과학자, 모험가와 이민자의 나라"라던 무솔리니 말을 기록합니다.


그 중에서도 날 정말로 놀라게 했던 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에우르의 요체,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였다.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이하 팔라초)는 아치형 개구부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 6칸, 가로 9칸씩 나있는 6층짜리 건물로(짐작건대 각각 6글자Benito와 9글자Mussolini로 이뤄진 본인 이름을 상징하고자 했던 것 같다) 건물 전후좌우 각각 상단에 비문이 로만체로 섬세하게 새겨져있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는 수많은 파시스트 마을 광장 그림을 그리면서 팔라초의 모습을 그려넣었다. 에우르 지구는 압도적인 크기와 면적을 지니지만, 지어지지도 못한 채 이미 낡아 빠진 이상이 되어버린 히틀러의 도시 ‘게르마니아’보다도 묘하게 관리가 쉬워 보인다.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
좌: <이탈리아 광장>, 1913 / 가운데: <거리의 우울과 신비>, 1914 / 우: <오후의 수수께끼>, 1914,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세계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41


팔라초는 콜로세움의 아치형 개구부를 따라 만들어져서 콜로세오 콰드라토Colosseo Quadrato, 혹은 '정방형 콜로세움'이라고도 불리는데, 단지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서 작은 언덕 위에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홀로 서 있다. 다른 건물에 가려지지 않은 채 하늘과 대비되는 자태로 서 있으며, 건물 하단에는 하얀 석회암 계단과 잔디와 영웅의 모습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보이는 건물 중 팔라초가 제일 인상적이다.


팔라초는 대장부 마냥 근엄한 자태로 우뚝 선 열주를 자랑하는 ‘로마 문명 박물관Museum of Roman Civilization’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파시스트 건축물과 잘 어우러진다. 이 지역을 알아보지 않고 방문한 관광객이 에우르 지구에 있는 모든 (대다수가 원래 계획대로 전쟁 이후 50년대 초기에 완공되었던)건축물에 그다지 좋지 않은 사상이 담겨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해도, 건물이 내뿜는 위압적인 기운은 눈치 챌 수밖에 없을 테다.

로마로마 문명 박물관Museum of Roman Civilization 열주(좌)와 다리(우)


모든 나치 시대 흔적이 파괴된 독일과는 다르게, 이탈리아는 역사유적을 보존하고자 파시즘 상징물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았다. 비문이 새겨진 기둥과 *프리즈, 맨홀 뚜껑에 더불어 미래파 작가인 포르투나토 데페로Fortunato Depero와 엔리코 프람폴리니가 상징과 기호로 가득 채워 만든 멋진 한 쌍의 모자이크까지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프리즈frieze는 서양 고전 건축이 지니는 독특한 구조로 건물 상단에 띠처럼 이루어진 부분을 의미 합니다. 주로 조각 장식으로 꾸며지며 파시스트 건축양식에선 비문이 새겨져있습니다.
좌: 포르투나토 데페로Fortunato Depero의 모자이크 / 우: 엔리코 프람폴리니Enrico Prampolini의 모자이크


에우르 지구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아니지만(그러기엔, 오늘날 이 동네 부동산은 너무 비싸다), 아무튼 그곳을 거닐다 보면 마치 무솔리니의 머리 속을 구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솔리니는 대중이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면서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고, 흥분하다가도 겸허해질 수 있는 도시를 세우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엔 그의 목표가 고스란히 드러난 건축과 디자인이 있다. 그런 국가의 통수권자인 무솔리니는 분명 죽어서 로마가 자신의 영원불멸을 기리는 도시가 되기를 바랐던 다른 통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테다. 물론, 뉴욕의 한가운데 살면서 이미 힘차고 웅장한 건물에 익숙해진 사람이 에우르를 보면 심드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은 정말이지 경외로운 곳이었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이라고 하며, 수세기에 걸쳐 공공 시설이 지어지며 고대 로마시대 정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에우르 지구가 포로 로마노가 아니라는 말은 더 이상 정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파시스트 디자인에 혹하다> 마침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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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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