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로마만국박람회EUR, 그리고 오늘날
본 시리즈는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 권위자인 스티븐 헬러가 쓴 기사를 번역해 소개하고자 기획했습니다. 기사 번역과 브런치 게재를 허가해주신 스티븐 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번역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색 단락은 본문 이해를 위해 제가 직접 채워넣은 부연설명이나 추가정보입니다. 원문과 구분하기 위해 인용문 외엔 '-합니다'체로 작성하였습니다.
파시스트가 남긴 유적이지만 아름답다
무자비했던 무솔리니 정권도 괜찮은 점은 있었다. 1927년 윈스턴 처칠조차 자신이 이탈리아인이었다면 무솔리니에게 ‘온 진심을 다해’ 그 행보에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했을 거라 말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기차도 제 시간에 도착하게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탈리아 기차는 여전히 거의 정각에 도착한다.
그러나 더 주목할 점은, 이탈리아 문화의 최고 감독관인 무솔리니 당수Duce는 빼어난 그래픽 디자인과 깜짝 놀랄만한 건축물(그리고 숱한 기차역도)을 책임지고 만들어내야 했다는 사실이다. 무솔리니 정권이 남긴 가장 뛰어난 ‘유적지’는 약칭 EUR로 알려진 로마만국박람회(Esposizione Universale Roma, 이하 에우르) 지구로 로마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에우르 지구는 하얀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도시 속 도시’로 원래는 파시스트 정권의 새로운 수도로서 지어졌다. 어떤 비평가는 에우르 지구가 고전주의 양식과 합리주의 양식을 뒤섞어 모더니스트가 좋아할 법한 허접한 싸구려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로마를 방문하며 마치 폐허가 된 고대 로마 제국의 궁전을 보는 듯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에우르 지구가 그것이 유래한 과거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건 분명하다. 에우르 지구는 폐허가 아니다. 오늘날 에우르 지구는 숙박, 행정, 문화 구역이다. 그런데도 전체주의 독재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나도 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에우르 지구가 영원히 전체주의 오점으로 여겨질 거라 말한다. 나 또한 파시즘에 열렬히 반대하지만, 그래도 파시스트가 남긴 것들만이 지닌 —정말로 음미 할 만한—미적 가치를 흠모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서 빅 브라더가 으슥하게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대사는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정당이 세운 이상은 무언가 거대하고 엄청나며 찬란한 것이었다. 당의 이상은 강철과 콘크리트 세상이자, 괴물 같은 기계와 무시무시한 무기의 세상이다. 또한 3억명 인구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채로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어 행군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며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쉼 없이 일하고 싸우고 승리하며,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과 생각을 박해하는 전사와 광신도의 나라이다.”
에우르 지구는 이런 사상을 선전하고자 지어졌다. 디스토피아 같은 파시스트 예술과 디자인을 찬미해선 안 되겠다마는, 그런 예술과 디자인을 제작한 근본적인 동기를 이해한다고 해서 파시즘을 찬미하게 되는 건 아니다. 설령 파시즘이란 못마땅한 이념과 운동이 만들어낸 유물에 도착적인 취향을 갖게 되더라도, 그런 유물이 만들어진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면야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패전했기에 가능했던 얘기일 수도 있지만, (E42라고도 불리는)에우르 지구는 개인을 집단에 통제하려 했던 파시스트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 어떻게 숙박과 업무공간을 제공하는 친근한 시설이 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다시 말해, 파시스트가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어느 정도 직접 지었다고 해서(에우르는 패전 후 오랜 기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에우르에 담겼던 부정적 의미가 영원히 씻겨져 내려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또한 구원받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파시스트가 만든 설계도, 건축물, 조각상도 어떻게 보면 무솔리니가 시저 콤플렉스Caesar Complex가 있는 데다가 칭찬에 목매단 독재자였기에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 모순이 있다. 파시스트가 이룩해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제작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선 권력과 프로파간다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중을 쥐락펴락 하는지를 더 깊고 섬세하게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에우르 지구는 프로파간다를 위해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 주제로 이야기하기 딱 좋은 소재이다.
시저 콤플렉스는 단숨에 유럽을 로마에 복속시키고 1인군주가 되려 했던 율리우스 시저처럼, 단기간에 강대한 제국을 일으키기 위해선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거나 혹은 정반대로 기꺼이 독재자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이 강대한 제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에우르 지구는 애당초 파시스트 혁명 전시 20주년 기념관으로써 1942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개관할 예정이었다. 장기적으로 에우르 지구는 로마시를 확장하려는 계획이었지만, 결국 (넬슨 록펠러가 뉴욕 올바니에 지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플라자를 따라한)새로운 무솔리니 제국을 상징하는 수도가 되었다. 에우르 지구는 고대 로마식 광장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파시스트 *조합국가corporate state를 아주 진보적인 체제인 것 마냥 꾸며내고자 했다.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의 성공 여부는 당내 전시 디자이너가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달려 있었는데, 파시스트 당내 디자이너는 이에 아주 출중했다. 예컨대, 미래파 작가인 엔리코 프람폴리니Enrico Prampolini가 디자인한 파시스트 혁명 전시 10주년 기념전은 파시즘을 상징하는 커다란 조각상과 정당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상세히 선전하는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를 나란히 전시했던 만큼 규모도 크고 대단했던 전시였다. 파시스트 당수 무솔리니는 자신의 신화를 꾸며내 퍼뜨리고자 예술과 디자인을 건축과 공공 행사와 결합시켰는데, 이는 대중에게 —적어도 자신을 우상화하는 데 만큼은—꽤 잘 먹혔다. 에우르의 제작 동기와 원래 계획이 어떤 결과로 끝이 났건 간에 파시스트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면서 특히 타이포그래피와 공공 디자인 분야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조합국가corporate state는 파시스트 국가 운영원칙 중 하나입니다. 노동자나 자본가가 대표하는 산업별, 직업별 조합을 국가에 종속시켜 노동과 생산을 사회적 의무로 삼는 국가 형태입니다. 사실상 자본가를 두둔하며 국가가 노동자 계층을 직접 지배하려는 체제입니다.
☞ 2부에서 계속..
차현호
현 에이슬립 BX 디자이너
전 안그라픽스 기획편집자&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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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주), 공업디자인(부)
디자인 분야 전반을 짚어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