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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박이 Jun 28. 2018

171226 우린 싼 항공사여서 조금만  주세요..?

여행 첫날부터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다.. ㅜ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새벽을 날아 방콕에서 치앙라이에 도착했다. 아담한 치앙라이 공항에 착륙한 비엣젯 비행기에서 내려 타박타박 걸어 공항 청사로 들어왔다. 입국장 입구에는 태국 날씨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렇게 따듯한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라니, 새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동남아시아라는 게 실감 났다.  

  수화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공항 크리스마스트리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순간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불교 국가와 크리스마스트리의 어색한 만남이랄까. 처음엔 불상이 가득한 태국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는 게 신기했는데, 이후 다른 도시에서도 심지어 새해가 되어서도 길거리에 걸려있는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장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요즘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넘어 전 세계인이 명절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저 관광객용 트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실제 반응은 현지인들에게 훨씬 좋았다. 눈사람과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대부분은 현지인들이었으니까. 

  그것보다 내가 더 신기했던 건 일 년 내내 더운, 겨울이 없는, 그래서 눈이 내리지 않는, 태국에서도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눈사람과 눈 관련 소품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평생 태국에서만 산 현지인들은 (기상이변이 아닌 한) 실제로 눈을 볼 기회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크리스마스 하면 겨울이, 겨울 하면 눈이 떠오르는 건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 비엣젯 항공, 태국 여행 첫날에 내 캐리어 박살 내다! 


완전히 깨진 캐리어 아래쪽, 나중에 알고 보니 위쪽에도 금이 가 있었다. -0-


  드디어 수화물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기다리던 짐들이 등장했다. 국내선 비행기라 그런지 추가 비용을 들여 부친 수화물은 몇 되지 않았다. 대략 5~6개 정도? 덕분에 수화물 벨트가 움직이자마자 대부분의 짐들이 나와버렸다. 벨트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내 캐리어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달려가 내렸는데 뭔가 이상하다. 어랏, 이거 왜 이럼? 캐리어 앞면 아래쪽 부분이 쩍~하니 갈라져 있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털썩) 말로만 듣던 비행기 수화물 파손이었다. 하나 넘으니 또 다른 게 등장한다고, 여행 첫날부터 이게 뭔 불운인가. 

  한국에서 방콕까지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왔던 캐리어인데, 방콕에서 치앙라이 오는 한 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안 그래도 잠을 못 자서 몽롱한데 여행 시작도 전에 깨져버린 캐리어를 보고 있자니 정신이 가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긴 낯선 나라고 지금 나는 혼자다. 즉, (슬프게도)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는 말씀. 정신줄을 부여잡고 우선 직원부터 찾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주변에 직원이라곤 그림자도 안 보인다. 아, 젠장!  


  무작정 깨진 캐리어를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다행히 직원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깨진 캐리어를 보여주니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친절한 직원분이 어떤 사무실로 안내해줬고, 그곳에서 다시 다른 분이 비엣젯 항공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내 상황을 들은 사무실 직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 캐리어를 쓱- 보더니 사무적인 어투로 잠시 기다리란다. 태국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비엣젯 항공 직원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어색하게 서서 기다리려니, 기분이 참 더럽다. 

  서류를 찾던 직원이 대뜸 묻는다. 태국어 할 줄 알아? 아니(ㅜㅜ). 영어는 잘 해? 아니(-_-). 그럼 그냥 내가 작성할게. 그냥 처음부터 네가 하지 뭘 물어보고 그러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 사무실에는 승무원으로 보이는 직원들 여럿이 더 들어왔고, 낯선 외국인이 끌고 온 캐리어를 보며 제각각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얼마 후 서류를 작성하던 직원이 분홍 종이를 내밀며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적고 사인을 하란다. 





# 겨우 500밧? 우린 싼 항공사라 조금만 주세요..?



 서류를 읽어봐도 별거 없어서 사인을 하고 다시 돌려주니 캐리어 파손 보상금이라며 500밧짜리 지폐 한 장을 내민다. 캐리어 파손에 대한 보상금이 500밧이라니,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다. 500밧이면 우리 돈으로 대략 17,000원 정도, 이거 뭐임? 장난하심? 멀쩡한 내 캐리어를 여행 첫날 저렇게 박살 내놓고 500밧 먹고 떨어지라는 얘긴 거야 지금? 혼자만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 

  내 캐리어 산 지 얼마 안 된 거야, 올 초에 말레이시아 갈 때 딱 1번 쓴 거라구. 가격도 500밧보다 훨씬 비싸. 저 돈으로는 캐리어 새로 못 사는 거 알잖아. 보상금이 500밧뿐이라니, 너네들 진짜 너무해! 짧은 영어로 울분에 차서 항변했더니 갑자기 사무실에 있던 열네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안쓰러운 눈빛과 호기심 어린 눈빛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무심한 눈빛도. 

  그녀들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규정이 그렇단다. 생각해보니 비엣젯 항공에서는 캐리어 파손 보상금을 정할 때 캐리어 가격이나 사용기간 같은 건 애초에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상관없이 자기들 규정에 따른 파손 부위나 정도에 따라 보상금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바로 한 달 전 싱가포르 항공에서 캐리어 파손으로 캐리어 구입 가격을 그대로 보상받았다던 언니의 경험담과는 참으로 다른 방향의 전개여서 더 당황스러웠다. 



  "우린 싼 항공사라 조금만 주세요."



  그때 한 명이 짧은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보상금액에 연신 불만을 표하는 내게 그녀는 거듭 반복해서 말했다. "우린 싼 항공사여서 조금만 주세요." 이미 이해했겠지만 이 말인즉, '비엣젯 항공은 저가 항공이니 보상금도 적어, 너도 알잖아?' 뭐 그런 뜻. 한창 열이 오르던 와중에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치앙라이에서 한국말을 들은 게 신기했고, 그 와중에 틀린 문장이 재밌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녀에게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주세요'가 아니라 '줄게요'라며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쿨럭) 

  그래, 뭐 어쩌겠니. 캐리어는 이미 박살이 났고, 내가 탄 저가 항공사의 보상금은 쥐꼬리로 정해져 있다는 걸. 영어가 짧아 더 따지지도 못하는데, 나를 달래는 비엣젯 직원의 어눌한 한국어는 소심한 전투 의지마저 날려버렸다. 심지어 오늘은 내 여행 첫날 아닌가! 여기서 소득 없이 징징거리며 한탄하느니 얼른 숙소에 가서 한숨이라도 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바꾸니 분노도 사라졌다. 

  그렇게 500밧 지폐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억울함이 살아나 소심하게 외쳤다. "오늘이 내 태국 여행 첫날이야! ㅜㅜ' 그러자 사무실에 있던 일곱 명의 그녀들이 진심 안타까운 표정으로 일제히 합창하듯 '아~~' 하며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비록 '싼 항공사라 조금밖에 못 줘도' 지금의 안타까운 내 상황에는 크게 공감해준 그녀들의 한숨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보상금 500밧'의 심리적 가치가 조금 커졌다. 






  비엣젯 항공의 그녀들과 안녕을 고하며 사무실을 나오면서 언니와 통화를 했다. 내가 겪은 일련의 상황들을 말했더니 언니도 황당해했지만, 그 와중에도 일단 깨진 캐리어를 테이프로 붙이고 이동하라는 알토란 같은 조언을 잊지 않았다. 테이프를 어디에서 구하나 두리번거리다 결국 다시 비엣젯 항공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그 사이 사무실엔 직원 두 명만이 남아있었고, 당장 이동을 위해 깨진 캐리어를 붙일 테이프를 빌릴 수 있겠냐는 내 부탁에 한 명이 응답했다. 

  깨진 캐리어 하단을 투명 테이프로 손수 붙여주던 직원은 진심으로 내 상황을 안타까워해줬다. 혼자 여행을 온 거냐, 태국은 처음이냐 등 짧은 영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최선을 다해 테이프를 꼼꼼하고 튼튼하게 붙여주었다. 덕분에 테이프를 붙인 깨진 캐리어를 끌고 방콕까지 이십 여일을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친절한 직원의 배려가 비엣젯 항공의 부주의함에 대한 원망을 씻어주었다. 





  하지만 여행 첫날 어이없게 박살 난 캐리어는 태국을 여행하는 동안 적잖이 마음의 짐이었다. 고민의 관건은 새로 살지 남은 기간 버틸지였다. 몇 번 안 쓴 거라 버리기 아깝기도 했고, 틈틈이 살펴본 새 캐리어들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많이 비쌌다. 그러다 방콕 아시안 티크에서 얼결에 괜찮은 캐리어를 (비교적) 싸게 득템 했고, 이후 베트남 여행부터는 새 캐리어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 캐리어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산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이기도 했다. 

  살까 말까 고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새 캐리어를 사길 잘 한 것 같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었을 테니까. 캐리어를 새로 살 때만 해도 여행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현명한 결정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 태국이 그나마 공산품 질이 제일 낫기도 했고. 투명 테이프로 땜방한 캐리어를 끌고 라오스에서 덜컹거리는 쏭태우를 타고 다녔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여러 돌발 상황들이 생긴다. 캐리어 파손은 이제껏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내게는 나름 큰 사건이었다. 그때마다 뒷목 잡고 쓰러진다면 여행을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래서 가급적 웬만한 일들은 빨리 털어내려 한다. 후회해봐야 돌이킬 수 없고 짧은 여행에서는 그럴 시간도 없으니까. 

  사실 일상에서 나란 인간은 미련과 후회가 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행을 떠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세로 새롭게 세팅이 된다. 여행 첫날 치앙라이에서 캐리어가 깨졌을 때도, 귀국을 며칠 앞두고 농카이에서 여행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랬다.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 유연한 여행을 위해 진심 필요한 자세다. 최소한 내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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