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족사진 한 장만 줘. 보고싶을 때 보게..."
몇 년 전 일이다.
아들이 군대가기 하루 전 날 내게 말했다.
"엄마, 가족 사진 한 장만 줘. 보고싶을 때 보게..."
아들이 제대한 지도 몇 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때의 울렁임과 명치 끝 아픔이 삭을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그 기간이 나에게도 긴 터널을 지나온 시절이었나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운다고 둘다 사표내고, 연고 하나 없는 이곳 울진 산골로 귀농했다.
그렇게 산골에서 오골오골 살 부비며 살다가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에서 잠깐 생활하고 바로 군대에 가는 거였다.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는 일이니 아들도, 나도 무언 속 독백이 참으로 길었다.
귀농하고 우리 가족이 들어 앉은 15평도 안되는 오두막은 바람만 씨게 불어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우리가족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다.
네 가족은 잉크처럼 물에 잘 풀어져 살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파파야 열매처럼 단단한 껍질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런 아들이 군대가기 전날 가족사진을 달라고 했다.
난 가족사진 뒷면 손바닥만한 곳에 이 글을 적어주었다.
"금이라 해서 모두 빛나는 것은 아니며
방황하는 자가 모두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강한 자는 나이들어도 시들지 않으며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못한다.
타버린 재에서 새로이 불길이 일고
어두운 그림자에서 새로이 빛이 솟구칠 것이다.
부러진 칼날은 온전해질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
--<반지의 제왕> 중, J.R.R. 돌킨--
아들이 평소에 좋아했던 돌킨의 이 글과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의 <인생찬가>를 깨알같이 적어주었다.
아들은 가족이 그리울 때마다 가족사진을 보며 힘을 얻었다고 했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제대했을 때 가족사진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들에게 이 글귀를 적어보내고 나는 오랜 날들을 밭을 오르내리며 노동에만 힘썼다.
그것이 마음의 달그락거림을 그나마 잠재울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군대간 아들이 힘들까봐 내가 걱정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
책과 사색, 여행으로 산골에서 성장한 아들의 영혼이 상처받을까 걱정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 또한 돌킨의 이 글을 떠올리며 내 삶의 잣대로 삼고 있다.
아들에게는 군대에서 아들의 심지를 굳건히 하는 글귀로 삼으라고 적어주면서 정작 나는 갈피를 못잡으면 안되지 않은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토끼의 번식력만큼이나 커져갈 때면 이 글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요즘에는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못한다'는 말을 옹알이 할 때는 내 삶의 뿌리는 어떤지 점검하게 된다.
된서리에도 끄떡없이 깊이 박혀 있는지 말이다.
귀농 초에는 작은 상처에도 내 삶이 뿌리채 뽑혀 내동댕이쳐지곤 했었다.
그러나 나의 귀농목적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다시 흙을 파서 내 삶의 뿌리를 심었다.
그리고 물을 주었으며 비바람에 쓰러지지 말라고 지주대도 세워 묶어주었다.
이제 내 삶의 뿌리는 어느 정도의 깊이에 박혀 있어 된서리는 피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아들의 군대갔을 때부터 아들과 내게 삶의 반딧불이가 되어 준 이 글귀를 오늘도 다락방에서 필사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사이에 끼어 풀벌레 소리도 들어왔다.
그대는 가슴에 어떤 반딧불이를 키우고 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