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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분 소피아 Aug 12. 2018

스페인 그라나다의 보석, 알람브라 궁전에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과 사랑이야기 3편

몇 년 전, 딸과 함께 유럽배낭여행을 갈 때, 스페인을 넣자고 했다.

그러나 딸은 “엄마, 내가 스페인을 가봐서 아는데 스페인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다시 가자”고 했다.

그 후 딸은 생각보다 빨리 직장을 덜컹 들어가는 통에 그 계획은 물건너 갔다.

머리 속에 ‘스페인’은 계속 주머니 속 자갈처럼 달그락거렸다.

그러다 지난 5월에 다른 인연들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다녀오게 되었다.     

연초에 남편과 일본여행을 다녀왔는데도 여행이라는 말만 옹알이 해도 왜 그리 심장이 벌러덩거리는지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오늘은 그라나다의 보석, 알람브라 궁전을 되새김질하려고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발렌시아를 거쳐 그라나다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황량한 들판이 손에 손잡고 이어졌다.     

올리브나무들이 어찌나 많이 들판에 들어차 있던지 눈만 깜빡하면 눈에서 올리브 열매가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들판이 활량하거나 말거나 천연덕스럽게 핀 노랑, 핑크색 꽃들은 중간중간 제 복에 겨워 웃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네 삶이 한없이 팍팍할 것같지만 가끔은 오아시스같은 핑크빛 환희도 어김없이 찾아올거라는 신의 메시지 같았다.

그래서 우리네 삶은 중단되지 않고 고통과 아픔, 기쁨과 환희가 뒤엉켜 꾸역꾸역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알람브라 궁전에 다다르기 전, 언덕의 경사면에 구멍을 판 집시들의 굴이 곳곳에 보였다.

문도 없이 집 인구를 알록달록한 천으로 막아 놓았다.

어쩌면 그 알록달록함은 번듯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그들의 삶이 언젠가는 알록달록하기를 바라는 듯 바람이 불어 천막이 흔들릴 때마다 빛났다.     

알람브라 궁전하면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이미 가슴에 알람브라 궁전에 대한 애틋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 작곡가 프란치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1852~1909)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타레가가 이 세계적인 명곡을 작곡하게 된 데에는 아픈 이야기가 있었다.   

  

타레가는 제자인 코차부인을 짝사랑했다.

어느 날, 알람브라 중전에서 타레가는 사랑을 고백했고 콘차부인은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그날 밤, 테레가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콘차부인을 떠올리며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명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아픈 사랑을 알람브라궁전의 자빠지는 풍경 속에서 서글픈 사랑과 고독이 만나 작곡을 했으니 그 곡이 얼마나 절절했을까는 찍어먹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곡은 거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아직도 울리고 있다.  

   

벨라탑으로 13세기에 지어졌다. 

우리의 청춘시절은 알람브라 궁전을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꿀 때였다.

그때는 해외여행이 슬리퍼짝 질질 끌고 옆집에 마실 갈 정도인 요즘과는 달랐으니까.

대학원 시절, 취업을 할 것인가, 박사과정을 갈 것인가 라는 고민에 내 청춘이 너덜너덜해져 있을 때, 이 곡을 들으면 손끝이 알콜 중독자처럼 달달 떨렸었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곡 덕분에 이미 청운의 심장은 갖잡아올린 생선의 가슴팍 마냥 벌러덩 거리곤 했었다.     

이슬람문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건축하기 시작해서 14세기에 완성한 것이다.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알람브라 궁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하루 관광객 수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고 여권심사까지 했다.     

이렇게 멋진 알람브라 궁전이 처음부터 관광지로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200년 정도 거의 폐허로 방치되다 시피 했는데 이것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은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이 쓴 <알람브라 이야기>와 앞에 설명한 작곡가 테라가가 작곡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덕분이라고 한다.     

알람브라 궁전은 군사요새라 할 수 있는 알카사바, 여름별장인 헤네랄리페 정원, 왕이 거주했던 나스르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네 부분으로 나뉜다.     

파티: 왕궁의 내부는 출입구보다 높은 거대 원형 파티오 둘레로 되어 있다.

이 궁전의 마지막 주인인 보압딜 왕은 전쟁에 패해 이 궁전을 내어주고 아프리카로 떠나며 “스페인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은데 알람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깝고 원통하구나”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쟁에 패해 이 금쪽같은 알람브라를 두고 스페인을 떠나 아프리카로 쫓겨가는 왕의 심정과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주는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궁전 곳곳에는 왠지모를 슬픔이 들러 붙어 있었다.

   

사실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이 역사적으로 어떻구, 건축양식적으로 저떻구, 그 아름다움이 어떻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여행자들은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연주곡을 그곳에서 들은 것만으로도 거지 발싸개같은 자신의 삶의 상처들이 치유받는데에 여행의 진가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붉은 색을 뜻하는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문화를 곳곳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문양과 타일, 조각품, 장식품, 상징물들이 즐비하다. 

처음에는 요새였던 것이 점점 더 확장되어 도시형태를 띠었고, 나중에는 호화로운 궁, 사원, 학교, 병영, 정원, 목욕탕 같은 작업장들까지 갖춘 수도로 변신하게 된다. 

아랍어로 그라나다는 ‘석류’라는 뜻으로 궁전에 석류나무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아세키아 중정은 물의 정원이라 할 수 있는데 중정 한 쪽 벽에 수백년 되어 보이는 나무가 죽어 쓰러지지 못하게 묶여 있었다.

왜 베어버리지 않았을까 궁금했는데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이 나무 아래서 근위대 귀족이 후궁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것을 알게 된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귀족을 처형한 다음 잘려진 머리를 나무에 매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보다.


이제는 애궂은 나무에게 화가 미친 것이다.

나무의 죄목은 사랑의 장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뿌리를 잘라 죽였다고 한다.     

알람브라 궁전은 이 궁전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 왕이 스페인을 잃는 것보다 이 궁전을 잃는 게 더 통탄한 노릇이라고 울며 아프리카로 갔다고 할 정도 사랑한 궁전이다.

둘째는 세계인들의 가슴이 남아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곡이 이 궁전을 오늘날의 영광으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세째는 근위대 귀족과 후궁과의 사랑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서 달그락거릴 것같다.

이렇게 사랑이야기에 절절해 하며 궁전을 빠져나오는데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낸 신랑, 신부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궁전으로 오르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고, 무심히 흐르는 구름은 삶은 이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는 거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연주곡을 그곳에서 들었을 때, 청춘시절의 고뇌가 되살아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여행이란 이처럼 죽어 엎드려 있던 추억들이 되살아나 지금의 내 삶을 파스텔톤으로 위로해준다.

알람브라 궁전 한쪽에 노란 오렌지를 내보이며 호객행위를 하는  오렌지 나무가 보였다.

'너의 여행에 행운이 있기를...'이라고 인사하듯..


산골 다락방에서 배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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