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 나인 필름'의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을 기념하며.
극장의 계절이 돌아왔다. 코로나 19가 극장산업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 ‘극장의 계절’이라는 표현이 조금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표현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전주 국제영화제가 무관객 영화제로 막을 내렸는데 비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관객석을 3분의 1로 축소한 상황에서도 개최 중이고, 각종 소규모 및 독립영화 상영 기관 역시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가려 노력 중이다. 그들 운영진과 극장산업의 지탱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또다시 영화 글을 쓴다.
앳 나인 필름이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을 열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언제나 논란을 불렀다. 누군가는 그의 영화가 몽환적이고 기괴한 기척에 마조히즘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누군가는 그의 영화가 가학적이며(특히 여성에게)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처럼 불편한 영화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이번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의 테마 ‘현실과 상상, 그 경계에서’는 팬과 안티팬의 취향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특정 영화는 일단 믿고 거르는 경향이 있다. 국내로 한정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영화가 타깃이 될 것이다. 해외로 넓힌다면 파스칼 로지에, 톰 식스 정도가 있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도 그중에 들어간다. 그는 파스칼 로지에와 톰 식스가 만든 우주에 빗대 자신만의 평행우주를 만들었다. <살인마 잭의 집>은 그의 가장 최근 영화로써 칸 영화제에서 10분 만에 관객 한 명을 구토시키는 데 성공했다.
<살인마 잭의 집>은 산속에서 조용히 살다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잔혹성과 마주하게 되는 한 지질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거짓말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시체 처리방법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우연히, 그리고 뒤늦게 발견한 자기 정체성의 과신과 과대망상. <살인마 잭의 집>의 스토리텔링은 이를 장면의 누락 없이 천천히 보여주면서 관객의 불쾌감을 유발했다.
그건 라스 폰 트리에의 노림수이자 특징이었다. ‘도그마 95’ 때문이다. 같은 덴마크 출신 젊은 감독 3명과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은 법칙을 세웠다. 인위적인 효과는 사용하지 않고 영화는 카메라 렌즈가 바라보는 현재 그곳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필름의 인위적 광학 처리나 필터 역시 사용을 금지한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을 배제하고 반드시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을 진행함으로써 현장감과 현실감을 살린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렇게 <백치들>과 <셀레브레이션>이 탄생했다.
구토할 만큼 불호가 있다면, 찬사를 보낼 만큼 호도 있다. <멜랑꼴리아>는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다. 몽환적인 배경을 슬로모션 화해 미장센을 만들었고 <스파이더맨>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커스틴 던스트를 캐스팅했다. <어둠 속의 댄서>는 애절한 스토리 속 청각적 리듬과 시각적 리듬을 교묘하게 배합했다. 그 속의 복고적 감성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영화에 음악을 삽입하지 않는다는 ‘도그마 95’ 법칙을 스스로 깨뜨렸다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의 영화를 논하면서 수위를 제외할 수 없다. 나는 다른 영화들은 몰라도 <브레이킹 더 웨이브>, <안티크라이스트>, <도그빌>만큼은 절대 가족과 함께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위를 하다 들킨 것 이상의 수치심으로, 몇 년 내내 가족과 거실에서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출과 강간, 신체 훼손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음에도 고간을 저리게 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그녀’가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가위로 잘라낼 때 나는 진심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들이 선정성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폐소 공포증, 고소공포증,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그것이 너무 심해 자신의 영화가 개봉하는 영화제에 참석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라스 폰 트리에는 언제나 그의 영화에서 자기 파괴와 자력구제를 시도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는 보수적인 스코틀랜드에서 남편의 소원을 위해 자신을 성적으로 희생하면서 신에게 정화를 요청하던 여성을 다루고, <안티크라이스트>에서는 남편과의 섹스로 방치하던 중 추락사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남편과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여성을 다루며, <도그빌>에서는 폐쇄적인 집단에 입성하고 학대당하며 종반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집단 구성원을 학살하는 한 여성을 다룬다. 자기희생에 대한 자력구제의 희망이 자신의 선택에 있음을 강조하는 영화였다.
자기 파괴와 자력구제는 <님포매니악>에서 가장 잘 구현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다. 볼륨 1과 볼륨 2로 나뉘어 있다. 왜 두 편으로 나누어 개봉했느냐면, 볼륨 1과 2 각각 한 여성의 성찰과 파괴를 다루기 때문이다.
볼륨 1에서 ‘조’는 어릴 때부터 성적 쾌락을 알아버린다. <드래곤볼>에서 주인공들이 구슬을 찾으러 다니듯, ‘조’는 더 짜릿한 쾌락을 느끼기 위해 모험한다. 성관계를 갖는 장면이 국내판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지만 사실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감독판을 봐도 별 문제가 없다. 어차피 특수효과와 카메라 구도를 이용한 페이크 샷이다. 특히 음경이 질에 삽입되는 장면은 도구를 사용해 촬영한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의 섹스 장면은 성적 흥분이 일어나게끔 조작되지 않았다.
젊을 때 즐길 만큼 즐긴 ‘조’는 ‘제롬’이라는 멋진 남자와 결혼한다. 영화의 막바지이자 어느 밤‘조’는 남편 ‘제롬’과 섹스를 한다.‘제롬’이 지쳐 침대에 쓰러져 잘 때 ‘조’는 부엌으로 향한다. 그곳에 앉아 자위를 한다. 퍽 퍽 퍽, 자위를 하며 흐느낀다. 아예 괴성을 지른다. 갑자기 쾌락을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자기 존재의 이유였던 중추신경의 자극이 끊어져버린다. 그렇게 볼륨 1이 끝난다.
볼륨 2는 늙어버린 ‘조’의 자력구제 연대기다. 낯선 이와는 난잡한 성관계를 시도하고 SM 전문가 ‘K’를 찾아가 치료를 받기도 한다. 잃어버린 쾌락을 찾으려 하지만 모두 헛수고다. 친구들이 떠나간다. ‘제롬’마저 떠났다.
이제 그녀는 철저히 혼자다. 마지막 수단으로 새 살림을 차린 ‘제롬’에게 분노의 원인을 돌린다. 왜 나를 버려서 이 지경까지 만들었냐고 원망한다. 그리고‘제롬’의 새 아내에게 구타를 당해 길거리 어딘가에 쓰러진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괴로움. 그것을 도저히 찾지 못할 때 드러나는 까맣게 타들어간 절망과 절규 그리고 수치심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볼륨 1과 볼륨 2는 모두 주인공 ‘조’와 그녀를 길거리에서 구해준 셀리그먼의 대화로 진행된다.‘조’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상처를 치료해준 셀리그먼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는다. `셀리그먼도 처음에는 그녀의 처지를 딱하다 생각하며 묵묵히 들어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자 셀리그먼은 바지를 벗어 축 늘어진 음경을 조에게 내민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총성이 울려 퍼진다.
<님포매니악>은 2014년에 감독판으로 봤다. 6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돌려보지 않았다.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다. 님포매니악(Nymphomaniac)은 색정증이라는 의미로, 분별없이 이성을 그리워하고 따르며 무분별한 성행위를 일삼는 성욕 항진증이다. 타인에게 그것은 비정상으로 보일지 몰라도 ‘조’에게 그것이 인생의 전체이자 전부였다. 내게 정상인 것들이 타인에겐 비정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심정을 상상할 때마다 이 영화를 생각한다.
사회에는 안타까운 참사가 발생하고 나도 자주 상처를 끌어안고 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느꼈을, 내가 통곡한 감정을 객관화한다. 그게 될 때는 냉정해지고 제정신을 차린다. 그런데 어쩔 때는 그게 안된다. 그럴 때면 이유를 찾곤 한다. 타인이나 주변 환경을 미친 듯 돌아보며 탓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 화살은 나 자신을 향하곤 했다.
나 자신을 탓하는 건 남을 탓하는 것보다 편하다.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할 때마다 난 언제나 나 자신을 책망했고 원망했다. 자주 나 자신을 파괴했고, 때때로 구제했으나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조’의 손에서 들린 총성은 큰 위로가 되었다. 매번 자기 파괴를 반복하고 자력구제에 실패하던 여자가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자신을 외부로부터 지키는 순간. 그녀가 마침내 자력구제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님포매니악>마저 쓰레기 같고 더럽고 추악한 영화로 기억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힐링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