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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Nov 22. 2020

기억하고, 뒤틀어 만들리라.
웨스 크레이븐을 기억하며.

모든 것은  <왼편 마지막 집>에서 시작되었다.

컷, 소리와 함께 3주 동안의 촬영이 종료됐다. 웨스 크레이븐은 그제서야 지시사항으로 난잡해진 각본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촬영은 대부분, 훗날 <13일의 금요일>(1980)로 유명해진 숀 커닝햄의 집 뒷마당에서 이루어졌

다. 길거리의 약쟁이들이 두 소녀를 강간·살해하고 이를 알아챈 한 소녀의 부모가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섬뜩한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촬영장은 화기애애했다. 어떤 제목을 정할지를 두고 모두가 들떠있었다. 영화는 개봉 전날 열린 시사회에서 <복수의 밤>이라는 타이틀로 상영되었다. 하지만 웨스 크레이븐과 숀 커닝햄은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영화홍보담당자가 참여한 가운데, 세 가지 독립된 제목으로 개봉을 하고 관객들의 반응과 성적을 살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날 저녁, 제목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바로 <왼편 마지막 집>(1972)이었다.     

<왼편 마지막 집>(1972)

마흔살의 나이로 대학 시간제 강사로 일하던 웨스 크레이븐은 영화에 관해서는 명백한 초보였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진 건 뉴욕 클락슨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우연히 구매한 16mm 카메라 한 대를 구매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대학강사라는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했고, 아내는 두 딸과 함께 자신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낮에는 영화사에서 편집을, 밤에는 택시기사로 일하며 기회를 엿봤다. 어느 날 밤, 운명이 찾아왔다. 크레이븐은 숀 커닝햄의 <투게더>를 편집하고 있었고, 숀 커닝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크레이븐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 마디 제안을 했다. “우리 영화 한 편 만들어보지 않을래?”    

  

숀 커닝햄

오래된 전설은 불투명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가 아니니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왼편 마지막 집>은 두 여자가 록스타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도시로 떠나며 시작된다. 길거리의 어느 약쟁이가 그녀들에게 마약을 강권하고 그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그리고 자신의 일당들과 함께 그녀들을 납치한다. 난동과 괴성, 고함, 강간과 살해가 차례차례 벌어진다. 그들은 피곤해진 몸을 뉘이고자 숲 속의 어느 오두막을 방문한다. 하지만 그들은 몰른다. 그 오두막이 살해했던 여성 중 한명의 가정이라는 것을. 그날 밤, 가족의 복수가 시작된다.      


사실 <왼편 마지막 집>은 복수과정의 몇몇 사소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잉그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과 거의 다르지 않다. 베리만의 처녀가 가던 교회가 크레이븐의 버전에서 어느 록스타의 콘서트로 바뀌고, 복수의 수단이 살짝 수정됐을 뿐이다. 하지만 <왼편 마지막 집>은 <처녀의 샘>과는 달리 진지함을 부정하고 관객의 고립을 타파한다는 방향으로 미국 호러 착취영화의 뛰어난 걸작으로 남았다. 이는 예의바르지만 불안해 보이는, 언제나 조용조용 말하던 전직 영문학 교수였던 웨스 크레이븐 스스로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면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천막 뒤에는 “5만 달러로 확실한 폭력영화를 만들라”던 제작사의 압박이 있었지만.      

잉그마르 베리만 <처녀의 샘>(1960)

<왼편 마지막 집>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치명적인 척하는 대사, 거대한 몸짓으로 복수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가해자를 천천히 고문하며 죽이는 등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람들에게는 아류작인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더 익숙한 실정이다. <왼편 마지막 집>이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다. 후문이지만, 당시 상영관에서 관객들은 소녀의 부모가 약쟁이들을 고문하는 장면을 보고 극장의 커튼을 찢고 고함을 질러댔다. 즉 흥행했으나 너무 잔인했다. 웨스 크레이븐은 비슷한 이야기의 더욱 세련된 버전으로 두 번째 장편영화 <공포의 휴갓길>(1977)을 연출해 전편의 부진을 딛고 흥행과 평가에서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웨스 크레이븐을 설명하면서 이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엘름 가의 악몽, <나이트메어>(1984)말이다. 그는 어느 날 신문에 난 기사 한 줄을 읽고 경악했다. 킬링필드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온 캄보디아인들이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거다! 그는 소리쳤다. 웨스 크레이븐은 꿈과 악몽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의 이름, 그리고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목격한 전신화상을 입은 노숙자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이를 합성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렇게 탄생했다.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크루거

숀 커닝햄의 <13일의 금요일>(1980)에 제이슨 부히스가 있고, 존 카펜터의 <할로윈>(1978)에 마이클 마이어스가 있으며,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1974)에 레더페이스가 있다면,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메어>에는 프레디 크루거가 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다. 동시에 호러영화 역사상 가장 많이 사랑받은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유일하게 압도적인 가면을 쓰지 않고, 주인공들과 치고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쫒아오는 데에서 공포를 심어주는 건 오직 프레디 크루거 뿐이다.    

 

프레디 크루거는 스무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유괴·살인해 동네 이웃들에 의해 보일러실에 처박혀 불태워져 죽었지만, 모종의 계약을 통해 미성년자들의 꿈에 나타나 그들을 살해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의 살해충동은 어릴 적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자란 트라우마 탓이다. 만약 당신이 꿈에서 프레디 크루거에게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게 된다. 웨스 크레이븐은 <나이트메어>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 평가받았다. 그의 인기는 최고조였다.     


하지만 웨스 크레이븐은 언제나 <나이트메어>에게서 도망치고자 했다. <나이트메어>의 제작사인 뉴라인 시네마가 <나이트메어>시리즈 5편으로 1억 70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음에도 그는 초연했다. 얼른 이 망할 영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들 <공포의 휴갓길 2>(1985), <악령의 관>(1988), <영혼의 목걸이>(1989)등을 포함해 그의 필모그래피가 공포영화의 테두리를 거의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나이트메어>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은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스크림> 속 고스트페이스. 빌리 루미스(스킷 울리히)와 스튜어트 마처(매튜 릴라드)

<뉴 나이트메어>(1994)로 드디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무덤에 보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크레이븐은 <스크림>(1996)을 제작하며 공포영화감독으로써의 자기성찰에 이르렀다. <뉴 나이트메어>를 제외하고 90년대에 영 주목받지 못했던 그에게 <스크림>은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전 <나이트메어>시리즈 중 1편만 감독한 것과는 달리, 크레이븐은 <스크림> 3부작에서 전편을 제작하는데 관여했고, 가장 최근의 <스크림 4G>(2011)를 통해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0세기 말 잠깐의 장르적 외도를 제외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호러영화일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오랜만에 <나이트메어>를 보고 감상에 젖어있던 중 웨스 크레이븐이 4년 전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장르영화가 그저 장르의 쾌감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닌 사회적 기류와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좀비영화를 제작하면서도 항상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골두했었던 조지 로메로처럼, 웨스 크레이븐 역시 기성세대의 억압, 전쟁, 흑백갈등, 빈부격차, 의사소통의 부재, 독재와 종교, 대중매체 중독 및 중산층의 몰락 등 현실적 문제에 영화로써 관심을 표명한 감독이었다. 동시에 전혀 촌스럽지 않게 우리의 여름을 경악시켜주던 존재였다. 우리는 그를 조금 일찍 떠나보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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