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와 부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생하는 오해
최근 회사에 몇 가지 이슈가 있어서 이참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 봄.
지시는 말 그대로 상사가 지시해서 일을 진행하는 경우이다. 결정자도 상사이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도 상사가 지는 것이 맞다. 담당자라는 이유로 책임까지 지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상사의 지시로 진행한 것이 명확하다면 책임은 상사가 더 많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상으론 결정자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시점 때문에 억울한 케이스가 생긴다. 의사결정은 수년 전에 이루어졌는데 문제가 뒤늦게 터지는 경우다. 결정한 상사는 다른 조직으로 이동했거나 퇴사했고, 담당자만 회사 안에 남아 있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고 뒷수습을 맡기게 된다.
또 다른 예외는 상사가 불법을 지시했을 때. 물론 불법을 지시한 상사도 문제지만, 불법인지 알고도 시키는 대로 했다면 담당자도 책임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 오재원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수면제를 대리 처방받았다고 해도, 후배 선수들이 100% 무죄이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상사가 지시한 일을 담당자가 진행하려 하는데, 조직 내 다른 누군가가 반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브랜드장이 지시한 일을 영업 담당이 실행하려 하는데 생산 담당이 반대했다고 하자. 1차적으로는 영업 담당이 생산 담당을 설득하겠지만, 담당끼리 조율이 잘 안 되면 공은 브랜드장에게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진행된 일이 성과가 나면 상사가 가장 많은 크레디트를 가져가고, 진행한 담당자도 성과를 나눠 갖는다. 본인이 책임지고 결정했으니 상사가 많은 공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
승인은 담당자가 먼저 제안한 것을 상사가 컨펌하는 경우다. 최종 결정은 상사가 하지만, 주도권은 담당자에게 있다.
상사는 어쨌든 본인이 컨펌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담당자보다 책임을 더 많이 진다. 다만 자기가 지시한 일이 잘못된 경우와, 부하의 제안을 승인한 일이 잘못된 경우는 책임의 경중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상사가 부하보다 징계 수위가 높을 확률이 높고(상사의 지시는 문제가 없었지만 부하가 실수 or 능력부족으로 일을 망친게 아니라면), 후자는 부하가 상사보다 징계 수위가 높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사가 컨펌을 하더라도 조직 내 다른 누군가가 반대한다면,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오로지 담당자의 몫이 된다. 물론 상사도 제안을 실행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나서서 사람들을 조율하겠지만, 상사가 먼저 지시해서 일을 진행하는 케이스보다는 조율에 대한 부담을 덜 느낄 것이다.
승인한 일이 좋은 성과를 낸다면 담당자의 공이 가장 크다. 상사가 기여한 것이 정말 '해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전부라면 담당자의 공이 거의 100%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직에서 어느 단계까지는 지시한 일만 해서 승진할 수 있지만, 어느 단계부터는 먼저 제안하고 승인받아 진행해야 승진할만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단계부터는 승진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라가게 된다.
지시냐 승인이냐는 단순히 누가 처음 말을 꺼냈는지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을 개발하라는 것은 '큰 틀의 지시'이지만, 어떤 기능까지를 담아 어떤 기간 동안, 얼마에 개발할지는 제안과 승인의 영역이다. 시스템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상사이지만, 3개월/5억 이하를 생각했는데 1년/20억 프로젝트 제안서를 가져가면 당연히 통과가 안될 것이다.
보고는 말 그대로 상사에게 보고한 것이다. 보고는 상사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일 뿐, 의사결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보고 후에 상사가 아무 의견이 없을 수도 있고, 인사말처럼 '잘해보세요' 했을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이 건을 승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고했는데 반대를 안 했으니 승인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문제가 생기면 100% 담당자가 책임을 뒤집어쓴다.
보고를 받고 무슨 내용인지 정확하게 이해를 못 했지만 회사의 우선순위 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 생각해 넘어갔을 수 있다. 보고를 받고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 실행이 되겠어?' 하는 생각에 넘어갔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상사가 이 건을 진행하라고 명시적으로 승인 또는 지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고'만' 한 건이 잘못되면 무조건 부하가 책임을 진다. 보고'만' 한 건은 잘되도 큰 칭찬을 받기 어렵다.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 누구 마음대로 진행했냐 소리가 나오고, 때로는 이미 난 성과도 아예 인정을 못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보고를 잘해야 한다. 보고를 잘한다는 것은, 상사가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뜻이다. 보고를 했는데 아무 결정이 없다면 그 보고는 의미가 없다. 정보만 전달하는 보고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 적어도 다음 후속 보고에서는 다른 정보 조각과 합쳐져 뭔가 의사결정이 일어나야 한다. 정보는 계속 전달하는데 아무 결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애초에 상사가 꼭 알아야만 할 정보일까?
무언가를 보고할 때는 이 시간을 통해 상사에게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보고 준비를 흐리멍덩하게 하면 나도 상사에게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얻고자 하는 것이 '승인'이면 명확하게 질문하고, 상사의 결정을 받아야 한다. 때로는 안건에 대한 '추가 지시'를 받을 수도 있다. 가장 안 좋은 경우는 보고가 끝났는데 상사가 '내가 무엇을 해줘야 or 결정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면서 나가는 것이다.
상사가 알아보라고 시킨 일에 숙제하듯이 정보 조사만 해가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