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1.
1)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학원 원장을 용서하기로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큰 마음을 먹고, 교도소에 복역중인 원장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어요. 나는 이제 마음이 편해요”라는 원장을 말을 들은 뒤, 구역질을 하며 교도소를 빠져나온다.
2) 17세기 중반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신부가 결국 잡혀 배교를 강요당한다. 예수가 새겨진 석판을 밟을 것을 요구받게 되고, 몇 번을 거부하는 동안 다른 천주교인인 일본 인질들이 고문을 받으며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결국 석판을 밟고 배교하게 된다.
2.
2020년 들뜬 한해가 시작되자마자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 가득한 바이러스에 인류는 한순간에 멈춰졌다. 적어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처음 겪는 혼란이 금방 이내 지나갈 것이라 여겼지만 어느덧 코로나 상황이 9개월이나 지속되고 있다. 팬데믹 속에 나름 선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올해를 돌이켜보면 몇 가지 키워드가 기억에 남는다.
<신천지, 요양병원, 이태원 bar, 사랑제일교회>
올해 초 처음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가 정말 소중하며, 그대로 큰 은혜임은 개신교인인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아질 줄 알았던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지금 상황에 ‘대면 예배 금지’의 현실이 개인교인으로써 너무 안타까웠지만, 지금까지 당연하듯 드려왔던 예배가 감사하게 여겨지면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되는 현실에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되는 귀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고민과는 별개로 세상에서의 개신교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목사님들이야 상식적인 선택을 하시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목사들이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배타적이며, 도무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고, 거기에다 그런 일부 목사들이 대형교회 목사 또는 기독교 단체의 대표로 있는 것을 보면서 적어도 대외적인 개신교의 한계가, 민낯이 드러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1.의 첫 번째는 영화 <밀양>의 내용이다. 신애(여자)는 아들이 유괴되 살해당한 뒤 나락으로 빠지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며 마음을 안식을 찾게 되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그리스도 정신에 따라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큰 결심으로 교도소에 가고 기어코 복역중이 가해자에게 이 말을 듣고 만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어요. 나는 이제 마음이 편해요.”
살인범도 교도소에서 신앙을 갖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분노하며 좌절하게 된다. 그 후 신애는 신앙을 부정하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하며 교회 사람들을 괴롭힌다. 왜곡된 신앙으로 기독교를 조롱하는 듯한 신애의 행동과 ‘개신교 안티 영화다’라는 논란은 차치하고, 가해자인 도섭, 성적인 유혹에 빠지는 장로 등으로 점철된 개신교인들을 보면 지금 현재 논란의 개신교인들이 오버랩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피해자 부모 앞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을 너무도 편하게 하는 가해자는 왜곡된 신애의 신앙만큼이나 신앙을 도구화한 결과일 것이다.
<밀양>에 나오는 도섭, 장로같은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결국 신앙이라는 이름의 이기적, 배타적 아집으로 똘똘 뭉친 뭐 이상한 종교인이 되고 만다. 문제는 누가봐도 그리스도 향기라고는 주일에 교회가는 것 빼곤 보이지 않는 그들이 본인의 마음은 지극히 평안하며, 나름(?) 홀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진정한 회개는 상대에 대한 사죄가 기본이다. 내 마음이 편하다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느껴졌다고 회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용서받은 듯 행동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상처요 폭력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행동들은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그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애가 구역질을 하며 교도소를 빠져나왔던 것처럼 누군가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적 행위로 인해 보이지 않는 토사물을 삼키고 있을지 모른다.
4.
1.의 두 번째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배교를 강요당했던 로드리게스 신부의 상황이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까? 생각하며 나름 비장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받는데 예수가 그려진 석판 밟는게 그렇게 대수인가?’
‘석판을 밟는 다는 것은 예수를 저주하고 모욕하는 행위잖아. 신부인 내가 그럴 수 있을까?’
17세기 신부 로드리게스의 괴로운 고뇌는 현재의 신앙인에게도 깊은 여운을 주고, ‘신앙의 행위’와 ‘이웃 사랑 실천’이 충돌할 때 우선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2020년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되는 이 상황에 17세기 로드리게스 신부의 비장함을 그대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 ‘대면 예배 금지’조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일종의 ‘배교’ 행위같이 여길줄은 몰랐다. 다수가 모이는 것이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고,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인 이 상황에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되는 것이 종교탄압이 될 수 있을까? 무리해서라도, 이웃이 불안에 떨더라도 꼭 무조건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가치가 과연 이런 것일까?
<사일런스>의 원작인 엔도 슈사큐 <침묵>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주여, 인간이 이렇게 슬픈데 바다가 너무 파랗습니다’
신념과 현실 앞에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와 고뇌를 잘 나타내는 문장이다. 17세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앙인의 고백이 2020년 이런 고백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주여, 이웃이 이렇게 괴로운데 우리는 너무 당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