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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앳더리버 Jul 31. 2022

나의 행복에 대하여

내 삶의 '행복 전구'들

대학원 수업 중 집단상담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대충 '내 삶을 지금까지 이끌고 왔던 나의 원동력 또는 키워드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나는 '행복한 삶'에 대해 말했던 것 같다.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진부하고, 당연한 얘기가 있을까. "행복하고 싶나요?" 라는 질문은 오히려 "왜 이런 질문을 하지?"라는 표정으로 질문의 의도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만큼 지극히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에 대해 논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많은 행복에 관한 책과 학술서들이 이 맨 앞장에 다 얘기해 놓은 수준일터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내 삶의 행복'을 지긋이 들여다보는 시간은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만큼 중요하다 생각한다.


몇 해 전 '서은국' 교수가 강연하는 프로를 보다가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었다. 이 분은 행복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인데, 얘기하는 행복의 핵심은 대략


'행복은 강력한 사건으로 얻어진다기 보다는 일상 곳곳에서 작더라도 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행복 전구'가 많이 켜질 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삶 곳곳에 쾌감의 폭탄을 설치하라'라며 좀 더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도 했다. 흔히 '소확행'을 많이 만들라는 얘긴데, 이 글은 내 삶의 '행복 전구'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곳곳에 설치하며 터질 때 느꼈던 여러 쾌감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이야기다.



친구들과의 쓸데없는 대화


중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몇몇과 지금까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3년 또는 6년 학창시절에 얼마나 많은 추억이 있다고, 그 시절보다 3, 4배는 많은 시간을 더 가깝게 유대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노년의 나이가 되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친구들의 대화가 그렇듯 나와 친구들도 만나거나 또는 단톡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시시콜콜하다. 예전 일들을 회상하며 한바탕 놀리고 비웃거나, 누군가를 비꼬는 등 언행은 중학교 시절 교실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대 때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너무 건설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걱정한 적도 있지만, 건설적(?)이었다면 오늘까지도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친구들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라고 있는 것 아닌가? 나에게 있는 일종에,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고 싶은 욕구는 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해소된다. 대화를 절대 공개할 수 없는 그 단톡방과 친구들과의 유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이란


학창시절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부모님 말을 수만번(?) 쯤 들어왔던 것 같다. 그 말을 몸소 실천하셨던 부모님이지만, 또 따라한다고 흉내는 좀 내보려 했던 나였지만 좀처럼 독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독서평설'이나 '중학생이 꼭 읽어야하는 국내 단편 소설'과 같은 책은 웬지 안 읽으면 이상적인 중학생에서 탈락할까하는

 두려움에 의무감을 찾아 읽는 정도였다. 결국 30대가 돼서야 20년 전 부모님의 조언은 뼈가되고 살이되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지금도 독서량이 크게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이 생긴다는 것',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책을 읽으면 분노(?)하게 된다는 것', '흥미로운 책은 아껴서 보고 싶다는 것'은 독서 인생에 매우 큰 변화다. 지금이라도 내 행복의 한편에 '독서'가 있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버스에서 나오는 내가 듣고 싶은 노래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는 말 들어보셨나? 마약인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무더운 여름, 출근 시간 만원 버스에서 들린다면? 덜컹거리며, 손잡이를 꽉 잡고 있어도 그 순간 만큼은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다. 퇴근할 때는 15분정도 걸리는 지하철역을 일부러 걸어간다. 직장을 나오면서 이어폰을 끼고 패어링되는 동시에, 바로 그 순간 찰나의 감정과 매치되는 노래를 들었을 때의 쾌감이란! 그 노래 한곡이 일터와 내 삶을 경계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치 온오프 스위치처럼 직장모드에서는 '오프'와 퇴근후의 삶은 '온'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퇴근의 사인이되는 노래라면 그 것이 바로 행복이지 않을까.



서늘한 바람을 가르는 자전거


운전 면허를 따고, 운전하고 싶어 안달난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샌가 최대한 운전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온전히 운전에만 집중해야하는 것도 답답하고, 교통 체증으로 길 위에서 허무하게 시간 낭비하는 것도 괴로웠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대안이 자전거였다.

동네 근처는 어디든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고, 주말엔 지하철에 자전거를 태울 수 있어서 꽤 멀리까지도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백팩까지 매고 타면 좀 더 젊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주말 오후 자전거를 끌고 동네 한바퀴 돌아보시라, 거기다가 <베란다 프로젝트>의 'Bike Riding'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새 서늘한 람을 느끼며 행복한 주말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아메리카노 한 모금


'시럽 안 넣은 아메리카노를 왜 마시지?', '독약같은 에스프레소를 파는 건 또 뭔가' 하고 자문하던 때가 있었다. 삶이 고되고부터였을까 어느샌가 느껴졌다. 아메리카노에서는 쓴 맛뿐만 아니라 신 맛, 심지어 단 맛까지 난다는 것을. 머리 속이 복잡하고, 하루 내 지친 순간이 오면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셔준다. 한 모금에 뇌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카페인이 전달되는 느낌이 들면 전원이 켜진 로보캅처럼 눈이 번쩍 떠지곤 한다. 그래! 행복이 뭐 별거냐. 4천원이면 살 수 있구나.



축구, 그리고 흥민이


말도 안 되는 꿈이었지만 초등학교 때까지 장래희망이 축구선수였다. 얼마나 진지했냐하면 부모님이 학원 선생님께 부탁해 내가 축구선수를 단념케 하도록 부탁했을 정도였다. 삼형제, 남중 남고.. 어쩌면 축구는 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교회의 인자하신 목사님이 축구할 때는 이탈리아 '가투소'선수로 변하시는 것을 보면 축구는 '고래를 춤추게하는 칭찬'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느껴졌다. 최근에는 보는 것을 잘 만족하고 있다. 주말에 손승민 선수 경기가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저녁 이후부터 계속 시간을 확인하면서 아내가 먼저 자길 바라고 있었다. 심지어 달콤한 말을 곁들이기까지.. 아무튼, 내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경기를 보며 후에 기사를 보는 것 마저도 내겐 큰 기쁨이 된다. 손흥민 선수가 오래 현역 생활을 하길 바란다.



강가에서


나는 어떤 장소를 좋아할까? 고민해 본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일 편하게, 쉽게 가는 곳은 '한강'이었다. 아마 근처에 바다가 있었다면 바다였겠지만, 날 좋은 때 한강에 가 강 너머쪽을 보고 있노라면 꿈틀대는 강 물결에 의식을 뺏기곤 했다. 최근에는 한강대교에 있는 '노들섬'에 가 63빌딩과 한강철교 바라보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러보고니 내 닉네임도 '앳더리버'다.

노들섬에서 보는 한강



10년정도 지났을 때 다시 이 글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랬었구나 씁쓸히 웃으며 의해 할까, 아니면 더 많이 추가된 행복 전구들을 다시 기록하고 싶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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