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종이 신문을 즐겨 읽었는데 안 본지 몇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가 갖다준 종이 신문을 읽다가 "종이 신문은 재미없는데, 재미있다" 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내뱉고, 어쩌다보니 한겨레 신문을 구독까지 하게 됐습니다. (지면 구성이 여전히 고루하고 따분하지만 포털로만 보다가 종이로 기사를 읽으니 재미가 색다르다는 뜻입니다 ㅋ)
하지만 읽다보니 한계라는 게 느껴집니다. 포털을 보지 않으니 쓰레기통같은 댓글을 안봐서 마음이 편하긴 한데, 그렇다고 세상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습니다. 이쯤되면 다시 구독 해지가 슬금슬금하고 싶어집니다.
사실 한겨레는 언론인을 꿈꾸던 저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신문이나 역사 하나쯤 없겠냐만은 한겨레 신문은 남다른 게 국민들의 성금으로 탄생한 진보 언론이자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한 획을 굵직하게 그은 언론이기 때문이죠. 내로라하는 진보 인사들이 주요 필진으로 참여했고, 뼈때리는 특집 기사를 줄기차게 쓰는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한겨레 신문인데 요즘은 어떻게 된건지 존재감 자체가 없습니다. 그나마 몇년 전엔 일베가 조롱하고, 문빠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면서 안티 전선이라도 형성되는 듯 했는데, 요즘은 이야기하는 사람 조차 없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몇년 전 언론사에 일하는 선배한테서 경향이고 한겨레고 훌륭한 기자들이 다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거 같긴 합니다... 그래도 시민의 손으로 만든 대표적인 한국의 진보 언론으로서 명맥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외면했다 다시 찾아오고를 반복하나 봅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스스로 깜짝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문을 가방에 넣어 들고 나갔는데, 공공장소에서 꺼내기 창피해하는 저를 발견한 겁니다. 전에 읽은 책에서 영국 사람들은 의식있는 사람의 징표로서 '더 타임즈'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다니곤 한다는 데서 그런 존재의 신문이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었는데요. 한국에서는 한겨레 신문 뿐만 아니라 무슨 신문을 들고 다니던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루한 사람으로 보이긴 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모든 신문사들이 굉장한 위기 의식을 갖고 바라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저 '요즘 사람들은 신문을 안읽고 스마트폰으로만 뉴스를 소비해'라고 탓할 문제는 아닌거죠. 상징성이 예전과 같지 않은 데 예전의 모습만 고집한다면, 기다리고 있는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일 겁니다.
신문은 담백하게 말하면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이지만, 사회적인 의미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사무실이나 식당, 병원 등에 갔을 때 조선일보가 있으면 어쩐지 멀리하고 싶은 선입견이 생기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그 자리에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에게 애정이 가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그 신문을 읽기 위해서 구독한 건 아닐테니까요. '이 사람은 마음이 약해서 아직도 못 끊고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 거 같습니다.
제가 말이 너무 심했나요? 밑에 기사를 보면 제 말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30대 이상이라면 날,물로 보지마 라는 유행어를 아실 겁니다. 이프로라는 음료를 선전할 때 전지현씨가 했던 말로 세기말 유행어였죠. 한겨레 신문 7월 17일자 스포츠면 메인으로 쓰였습니다.
별들의 잔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거의 속담 수준으로 많이 쓰이는 문구입니다. 오래된 문구는 지면의 활력을 떨어트립니다.
하반기 출시될 신차를 소개하는 기사인데, 세련된 신차의 디자인과 대조적으로 제목은 영화 놈놈놈 인용 + 차차차 라는 구닥다리 용어가 쓰여서 전혀 눈길이 안갑니다. 밑에 지저분하고 못생긴 광고들은 덤입니다. 이처럼 지면의 아름다움을 헤치는 광고는 신문사에서 자체 제작하는 방향으로 바꾸던지 새로운 방법의 도입이 절실해 보입니다.
인터뷰 기사에 사진을 넣는 이유는 시선 끌기, 지면의 여백 주기, 신뢰성?(진짜로 만나서 인터뷰했다)등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성의없는 사진들은 주목을 끌거나 지면에 숨통을 불어넣기는 커녕 완전 역효과를 내죠. 특히 한국의 50대 이상 아저씨들은 기본적으로 얼굴이 화가 나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인상을 줍니다. 이런 사람들 사진을 실을 때는 고민을 훨씬 더 많이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팡짱끼는 포즈 좀 안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10년 전에는 이 포즈가 꽤 신선했는데 이제는 5만번쯤 보다보니 원래 사진은 팔짱끼고 찍는 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위에 분은 팔짱이 안껴져서 스스로를 두 팔로 껴안고 있는 것처럼 어색하죠. 프로의 세계에서는 이런 사진은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사진은 그나마 좀 예쁘죠? 인터뷰이가 트레드를 잘 소화하는 분일 때 가끔 언론사의 역량을 뛰어넘는 사진이 나오는 거 같습니다.
자소서를 잘 쓰게 하소서 라는 충격적으로 촌스러운 기사 제목입니다. 저런 제목은 뽑지 말아야 하는 기사로 스크랩해서 대대손손 교육해야 합니다.
기사 배치나 지면 편집도 구한말 시대라도 해도 믿을만큼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오래된 걸 고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기사에 눈길이 가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경향신문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습니다.
2019년 7월 6일자 신문인데 제목과 사진 배치, 편집이 30년 전 신문을 복사해 놓았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이럴거면 차라리 이런 지면에는 '레트로'라는 이름을 붙여서 '30년 전 신문을 복원합니다'라는 친절한 문구라도 써주시든지.
그리고 이건 사진 한장으로 '울림'을 주는 목적을 가진, 신문의 전통적인 코너인데요. 임팩트도 없고 눈길이 가지도 않고 당연히 울림도 없습니다. 오히려 약간 오글거릴 때가 더 많습니다. 정말 좋은 사진을 시원시원하게 쓰던지 아예 안쓰는 게 낫겠습니다.
대충 쓱 둘러봐도 한숨부터 나옵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봤지만, 겉으로 드러만 문제만해도 너무 심각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데야 할지 모르겠는 오래된 집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비단 한겨레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디나 비슷합니다. 문제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바꾸지 않아도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봐주는 충성고객이 있지만, 한겨레는 얼마나 남아있는지 의문입니다.
몇년 전에 경향신문을 구독하다가 해지했는데 전화가 와서 도와주는 마음으로 다시 구독해달라고 하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고요. 언론사가 자선단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왜 구독자들이 외면하는지 내부적으로 철저한 성찰과 비판으로 변화를 시도해야지 구독 해지하는 사람에게 사정사정하는 게 답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그나마 잘하고 있는 곳은 중앙일보라고 봅니다. 개별적인 기사의 완성도는 차치하고, 기획이나 지면 구성 등을 비교했을 때 주말판으로 나오는 중앙선데이를 참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주말판이라서 주중판보다 훨씬 가벼운 기사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저처럼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는 기사들이 대부분지만, 가십은 아니고 재미있는 잡지를 보는 느낌입니다.
7월 6일자 1면 톱기사로는 직장환경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사주나 노동자나 모두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이죠. 3면이 이어지는데, 결론도 아주 바람직합니다. 회사가 이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정신건강도 살피는 게 더 이득이라는 취지의 결론이 이어지죠. 무엇보다 제목이 정말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고, 눈길을 가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2페이지에는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언박싱에 대한 기사를 다룹니다.
이어지는 기사들도 세대를 불문하고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트렌드를 다룬 기사인데 위에 경향신문의 <바지, 길어도 쿨하면 되지> 와 비교하면 어디가 잘하고 있는지, 어느 기사가 읽고 싶은지 금방 눈치채실 거라고 봅니다.
인터뷰에 실린 사진을 비교해보자면,
위에 두개는 경향신문, 아래는 중앙선데이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인터뷰한 김득중씨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로 사실 굉장히 의미있는 분이기에 기사도 읽어봐야겠지만 기사에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성의있는 컨셉 사진을 찍었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책상 위에 어색하게 놓인 손에 저도 덩달아 어색해집니다. 1면 기사는 같은 포즈로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사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반면 중앙일보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과학자를 인터뷰하면서 사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이죠? 다리를 벌리고 스툴 위에 책을 쌓은 후 안경을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 친근감과 호기심을 줄 수 있습니다. 사진도 명암을 강하게 줘서 극적인 효과를 주고요. 사실 아저씨들한테 저런 자세 시키면 안한다고 난리입니다. 얼마나 잘 설득하는지가 관건이죠. 다른 신문 같았으면 또 팔짱끼라고 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신문의 크기를 판형이라고 하는데, 다른 신문사들은 여전히 '대판'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신문 크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앙일보는 주요 신문사들 중 유일하게 베를리너판(가로 323㎜*세로 470㎜)을 쓰고 있습니다. 베를리너판은 기존 대판 신문보다는 작고, 타블로이드판보다는 약간 큰 사이즈로,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미국 <뉴욕타임스> 등이 베를리너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대판 신문과 베를리너판 신문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베를리나판을 들고 읽었을 때 가독성도 좋고 넘기기도 편하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대판을 버릴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십수년째 계속되고 있겠지만 어느 누구하나 과감한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판은 조그만 스마트폰과 모니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가스레인지가 있는데 부싯돌로 불을 붙여야 하는 것처럼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존재입니다. 심지어 장점이 뭐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을 보는데 방해요소로만 작용한다고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