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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ndo Sep 18. 2024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영화롭게 6] 그 나무 옆엔 신의 꿈보다 푸른 오솔길이 있다네.

생명의 모든 것이여
쓰라린 기억의 손을 내 사랑의 손에 두어라
그리고 삶의 뜨거움을 느끼는 너의 입술
내 사랑의 입술에 보내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포루흐 파로허저드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중.    

 

주인공은 툭하면 시를 읊는다. 처음에는 생뚱맞은 장면에 실소가 터졌지만, 내 무지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들의 문화일 수 있으니. 그리고 그의 영화처럼 시적인 영화는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은 종종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흘러가고 사라지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 아닐지. 그렇게 영화 속 주인공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면의 분명한 변화를 경험한다.


얼마 전 이란의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이 프랑스로망명했다. 창작의 자유가 꺾인 예술가가 할 수밖에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란 영화는 정부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제작과 배급이 금지되고, 제작자의 신변까지 위협을 받는다. 그럼에도 이란 영화가 계속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걸 보면 변화의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자파르 파나히의 <노 베어스>에서도 출국이 금지된 감독 자신이 국경 마을에서 원격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속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거대한 곰 같은 권력의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고 맞설 힘을 꿈꾸는 그의 노력이 짠했고, 영화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던 잉마르 베르히만의 말을 더 믿고 싶어졌다.      


처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보면서 단조로운 이야기 속에서 풍기는 사람 냄새에 매료되었다. 이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체리 향기>, 막다른 재난과 죽음 앞에서 삶을 깨닫게 하는 힘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그리고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새로운 감탄, 그리고 뒤늦게 본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제목부터 얼마나 압바스적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 위로 차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달린다. 감독의 영화를 봤던 사람이라면 이 반가운 장면에 슬쩍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차에 탄 정체 모를 세 남자는 빈약한 정보를 들고 마을을 찾아간다.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 탐탁지 않은 여행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한 소년이 등장하면서 미로 같은 시골 마을 풍경이 섬세하게 펼쳐지고, 누군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통해 고대 장례 의식을 취재하러 왔다. 하지만 밀린 숙제 같은 죽음은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난다. 급한 것 없는 이곳에서는 죽음도 서두를 생각이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 그의 목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도리어 죽음을 밀어내는 위대한 일에 기쁨으로 뛰어든다.      


죽음을 기다리며 강제 휴가를 맞은 그는 소년과 마을을 떠돌며 시간을 때운다. 영화는 일과 나태함에 대한 명상을 계속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다.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유머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그것은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에 쌓인다. 그와 마을 사람들의 건조하지만 솔직한 말장난 같은 대화와 티키타카에 웃음이 터졌다. 또, 휴대폰 신호를 잡기 위해 높은 언덕 그것도 묘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은 폭소와 실소를 거듭하게 한다. 대사만 보면 너무 밋밋한데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순간 웃음으로 변하는 것이 마치 마법 같았다. 전문 분야가 없고 몸 전체를 본다는, 할머니는 병이 아니라 늙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의사마저 묘하게 웃겼는데, 동시에 생각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꼭 필요한 전화는 묘지 앞에서만 터지고, 얼굴은 나타나지 않지만, 존재감만은 분명한 구덩이 파는 사람에게 사람 뼈를 받는다. 게다가 흙더미에 깔린 그 사람을 구해내기도 한다. 감독은 죽음을 곁에 두면서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그 뼈를 시냇물에 던지고 돌아서면서 죽음을 다시 삶 속에 흘려버린다. 보물을 찾아 이 마을에 왔다는 그의 농담이 진짜가 된 셈이다. 마을 떠난 후 그가 뒤집혀도 다시 일어나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거북이처럼, 흙더미를 굴리고 또 굴리는 쇠똥구리처럼 자신만의 삶을 더 잘 살아갈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로 보일 정도로 리얼했던 이유는 등장 인물들이 실제 마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년도 마을 양치기라니 할 말이... 이란 사람들은 카메라에 익숙한 유전자를 가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방인을 대하는 그들의 환대 문화가 영화와 삶의 경계를 허무는 데 큰 역활을 한 것 같다.      




[Zoom in]     

- 우리한테는 너밖에 없어/ 전 시험이 있어요.

- 마음이 따뜻하면 목소리도 따뜻하죠.

- 의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

- 늙는 건 나쁜 병이죠./ 하지만 더 나쁜 병도 있어. 죽음. 죽음이 제일 나쁘지.

- 저 세상이 더 아름답대요. /꿈같은 약속보다 지금이 좋다네...     


[음악]

원래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소리가 더 인상적이며 클래식이나 전통 음악이 사용되는 편이다.      

이 영화 음악은 이란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페이만 야즈다니안(Peyman Yazdanian)가 맡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NTskdryR-48

Wind Will Carry Us by Peyman Yazdanian

         

*영화 OST 곡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곡. 영화 주요 장면 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kBAKrEICR4

Le Vent Nous Portera by Noir Dés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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