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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Jan 25. 2022

애증의 교정 교열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14

편집자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을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 일을 못 하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업무가 있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편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교정 교열이다. 텍스트 읽는 걸 좋아하는 내가 교정 작업을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편집디자이너와 편집자


편집디자이너였을 때도 디자인만 하지는 않았다. 저자와 연락하고 원고와 일정을 챙기며 편집자에 준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편집자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교정 교열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집디자이너는 원고 전체를 조판하면서 전체적으로 형식에 맞지 않는 부분을 체크하고 수정한다. 오탈자를 찾아 바꾸고 혼용되는 용어를 파악해 기획자나 영업자에게 전달한다. 그렇다 해도 원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씩 꼼꼼히 읽으며 틀린 부분을 찾고 사실 확인을 한 적은 없다.


▶ 회사마다 요구하는 편집디자이너의 역할이 다르다. 개인 성향도 반영된다. 나는 편집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경계가 모호한 회사만 다니다 보니 더 신경 써서 챙기게 됐다.



학술서의 교정 교열


내가 만든 책은 의학/간호학/공중보건  전문 학술서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교정   문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보다 내용상의 오류를 확인하는  먼저였다.


개인 저서가 아닌 번역서는 원서와 대조하는 일이 먼저다. 저자의 원고가 원서와 다른 부분이 있는지 채크한다. 원서에는 있는데 원고에서 누락되는 부분도 많으므로 꼼꼼하게 대조해야 한다. 또 원서에서 이탤릭으로 표시한 부분, 볼드체로 강조한 부분 등 형식이 다른 부분도 반드시 체크해서 적용한다.


기본적으로 통계자료나 기사, 그래프 등은 출처를 확인하고 원고와 일치하는지 검토한다.


교과서는 단행본과 다르게 요소가 많다. 본문 외에 표, 그림, 박스, 용어 정리, 생각할 내용, 연습 문제, 요약 등의 내용이 추가된다. 형식을 통일해야 하는 요소가 많아질수록 신경 쓸 부분도 많다. 부(part)도 많다면 표/그림 번호도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핵심은 수없이 나오는 의학용어였다. 용어는 영어, 때로는 한자까지 병기한다. 그럼 용어마다 한글과 영어, 한자가 서로 같은 뜻인지 찾는다. 또 학과마다 구용어와 신용어 중 사용하는 용어가 달랐다. 예를 들어 ’신용어(영어)’가 아니라 ‘신용어(구용어, 영어)’처럼 병기하기로 했다면 ‘구용어(신용어, 영어)’로 표기된 건 없는지 확인한다.


전문가인 저자도 사람인지라 꼭 틀리는 부분이 나왔다. 일정에 쫓기는데 스펠링을 대조하느라 교정 진도가 안 나갈 때는 초조해지면서 스트레스가 차올랐다. 그러니 그림마다 십수 개의 캡션을 표기하는 해부학 책을 만들 때는 어땠을까. 그야말로 온 신경이 곤두섰고 극도로 예민했다.

 

그렇다고 외주 교정은 선호하지 않았다. 학술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잡아야 할 건 놓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체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대로 수정할 수 없으니 교정지를 다시 검수하느라 일이 더 늘었다. 분명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말이다.



애증의 교정 교열


원고를 읽을 때는 늘 답답했다. 소설과 에세이처럼 좋아하는 내용도 아니고 그저 일로만 느껴지는 텍스트에 치였다.


많은 편집자가 그렇듯 나도 교정지와 한 몸이 되었다. 주말에도, 약속 장소에도 교정지를 챙겨 다녔고 그도 안 되면 출근을 했다. 그런데도 매번 시간에 쫓기는 압박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교정을 보고 또 봐도 줄지 않는 물리적인 양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 책만 끝나면…’이라는 희망이 통하지 않았고, 나는 점점 야위어 갔다.




하필 근무하던 사무실은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다른 층에 비해 층고가 낮았고 옆 사람과의 간격도 좁았다. 책상 아래에는 교정지가 쌓여 발도 편하게 뻗을 수 없었다. 넓고 쾌적한 파주출판단지에서 일하다가 빼곡한 서울로 나와 맞이한 답답함은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결국 나는 건강을 크게 잃었고, 편집자를 내려놓았다. ‘가장 짧게 다닌 회사’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며 퇴사했다. 내가 참을성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내가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로 남았다. 건강과 바꿨으니까. 그렇게 간절했던 편집자의 꿈은 잊힌 채 말이다.



▶ 평소에는 들어가 볼 일 없었던 의학책 교정 시 참고 사이트  

- KMLE 의학검색엔진 http://www.kmle.co.kr/,

- 대한의사협회의학용어위원회 http://term.kma.org/


▶ 저자에게 가장 많이 요청한 교정사항  

- 같은 용어인데 여러 단어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전체 통일 부탁드립니다.

- 책 전체 형식이 달라 임의로 통일하겠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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