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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Feb 09. 2022

어제는 편집디자이너, 오늘은 편집자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15 꿈을 이루었다

“나는 글을 다루는 편집자가 될 거야.”


편집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회사에 가고 싶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매일 괴로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과 문장을 다듬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꼭 편집자가 될 거라고 친한 동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게으른 내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편집자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무언가에 홀린 듯 수강 신청을 했다. 파주출판단지에서 퇴근 후 합정에 내리면 7시쯤 되었다. 버스 한 정거장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 수업 장소로 향했다. 수업은 7시부터였으니 나는 언제나 지각생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으면, 꿈과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10시, 수업이 끝나면 다시 한 시간 반 거리의 파주로 향했다. 저녁도 못 먹고 수업을 들으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이직한 회사에서 편집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편집자가 될 거라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회사는 내가 대학생 때 내 전공과목으로 유명해서 입사를 꿈꾸던 곳이었다. 심지어 첫 회사를 퇴사하고 편집자로 면접도 본 곳이다. 당시에는 내 전공과목만 믿고 편집디자이너 경력으로 신입 편집자에 지원했다. 그러니 출판 경력은 있지만, 편집자 경력은 없고, 심지어 전공과목 경력도 아닌 애매함 때문에 불합격했다. 하지만, 이번에 지원할 곳은 의학 계열인 자회사였다. 의학 편집자를 꿈꾸던 건 아니었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6년의 경력이 있으니 희망도 있었다. 편집디자이너가 경력 편집자로 지원한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동료의 추천 덕에 빠르게 면접이 잡혔다.


1차는 실무자 면접이었다. 차장과 수십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2차로 부장 면접을 봤다. 직속 상사가 될 분인데 인상이 강렬해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내 경력으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디자이너인데도 면접을 보자고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복수전공이 국어국문학이더라고요? 가르친 경험도 있고요? 교정 교열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휴우-’ 안도의 한숨을 그대로 뱉을 뻔했다. 긍정적으로 면접을 마쳤다.


다음 날 아침, 출근 길부터 들뜬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결정 나지 않았지만 곧 이 회사를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즈음에 임원 면접을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임원 면접이라니!’ 회사에서 기쁜 마음을 감추느라 혼났다. 

 

대표와 부대표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 면접이고 직종을 바꾸는 일이었다. 더욱이 경쟁사 대표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외쳐야 하니 심장이 조여왔다. 인자한 인상의 임원들은 역시 내 디자이너 경력을 문제 삼았다. 극도로 초조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국어 교육 경력을 열심히 어필했다.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을 데려오니 상도에 어긋나는 것 같네요.” 

대표가 말했다. ‘앗! 나 합격인 건가?!’ 이 말을 들은 후로 긴장을 풀고 진심으로 웃으며 담소를 나눈 기억이 난다. 한편으로는 현재 재직 중인 회사를 배려하는 임원의 말에 감동했다. 반드시 이 회사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합격 전화를 받았다. 눈물이 났다. 나는 꿈을 이룬 거니까! 가슴이 벅찼다. 다음 날, 품고 다녔던 사직서를 시원하게 제출했다.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하는 설렘이 좋았다. 몇 년 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사실 몇 달 전, 유명한 문학 출판사 편집팀장으로 이직하기로 했었다. 드디어 의학책을 탈출하고 단행본을 만든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하지만, 출근 날짜가 다가올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왜냐하면 디자이너였으니까. 단행본 조판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지만, 표지 디자인은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출근을 못 하겠다고 알렸다. 

“일을 잘하실 것 같아서 바로 뽑았어요, 연봉도 올려드렸잖아요! 단행본이라 더 재미있게 일하실 텐데… 대체 왜 못 오시는 거예요?” 

‘디자인이 싫어서요. 자신이 없어서요.’라고 답할 수 없었다. 마침 이직을 확정한 직후, 현재 회사에서 성과를 인정받았다. 연봉도 올랐지만, 서로에게 인간적인 신뢰가 생겼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실제로 안정감이 생기니 모험이 가능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것을 찾아 편집자 수업을 들었고 그 선택이 여기까지 왔다. 


출판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꿈꾸던 장면을 만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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