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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ena Apr 24. 2019

마음을 말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니 어딘가에는 마음을 헐뜯기만 하는 곳도 있는 거다


#03 마음을 조금 더 사랑하기



  베를린에서의 다소 늦은 휴가를 막 끝낸 뒤였다. 모두가 의아해하지만, 베를린과 서울 사이에 직항 노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경유할 곳을 택해야 했는데, 마침 그곳이 파리였다. 애초에 파리보다 베를린을 더 사랑하는 드문 취향 탓에, 내게 파리는 단어 그대로 경유지였다. 여행지로써의 기대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십일월의 파리에 도착했다. 밤이었다. 프랑스어라고는 봉주흐밖에 모르는 데다가, 연일 뉴스에 소개되는 사건과 사고의 이야기들이 더해져, 일종의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체크인 후 차마 다시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룸서비스 파스타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는, 그만 잠들었던 것 같다. 걱정이 지나쳤다고들 했다. 하지만, 나는 경계심이 매우 크고, 여행은 언제나 안전제일주의이며,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결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다시 해가 뜨고서야 파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몽마르뜨에 올랐다. 놀랍도록 강렬한 악취를 풍기는 파리 지하철을 타고, 다시 한참을 걸어 겨우 도착한 곳이었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만큼 맑은, 그곳 몽마르뜨 언덕에 한참 앉아 있었다.

  회사생활 5년을 꽉 채울 때쯤이었으니, 온갖 어려움과 불만, 패배감, 억울함, 속상함과 슬픔, 짜증, 분노로 가득한 나였다. 그런 마음이 정확히 무엇을 향했는지는 모른다. 회사인지, 한국이라는 사회인지, 한국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인지, 그 모두인지, 중요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아팠으니까. 아무튼 그 시간의 나는 완벽히 질려있었다. 따스한 마음이라고는 평생 몰랐던 사람처럼, 영영 다시 모를 사람처럼, 끔찍한 표정으로 질려있었다. 그런 마음을 언덕을 오르는 계단 마다마다에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놓았다.

  바람도 볕도 포근해서 한낮을 다 보냈다. 마음을 말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늘어놓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는 오직 나뿐이었으나, 쨍쨍한 볕과 바삭거리는 바람 덕분에, 어떤 마음도 남김없이 바짝 말랐다. 혼잣말로 마음을 내뱉고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기대없이 겁만 나던 파리는 마음을 쉬어가는 경유지가 되었다.


  그러니 어딘가에는 마음을 헐뜯기만 하는 곳도 있는 거다. 무턱대고 못되게 구는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 곳에도, 매일을 출근해야 한다. 황당하게도 내가 나여서 미움받는 곳에서, 유연히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살아온 삶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끝내 살아야 하는 거다. 그런 곳인 거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몽마르뜨가 좋으려면, 지구 어딘가에는 끔찍한 곳도 있어야 한다고, 마침 내가 그곳에 살 뿐이라고.


  다시, 내 마음을 말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본다. 대부분의 날들을 마음을 헐뜯기만 하는 곳에서 살더라도, 단 하루를 내 마음을 말할 수 있는 곳에 산다면, 이런 삶도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맨날 아프기만 한, 그럼에도 어쩔 수 없어서 답답한, 내 마음을 조금 더 사랑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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