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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프롤로그

그러니까 결국, 음식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했다

리틀 포레스


집들이 날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친구들이 모여 왁자한 시간을 보내고 난 후다 같이 영화라도 한 편 보자며 맥주 한 씩을 들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네가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있어! 주인공이 그냥 딱 너야!"
친구 하나가 확신에 차서 호들갑스럽게 고른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리틀 포레스트>였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며, 일본에서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두 편으로 개봉되었고, 뒤이어 한국에서도 임순례 감독 연출, 김태리 배우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바로 그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이치코는 엄마와 살던 고향집에 돌아와 살며 제법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빵, 떡, 술, 잼, 식혜에서부터 생선요리, 각종 푸성귀 요리와 저장음식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재료도 다양하다. 요리의 레시피는 엄마의 것도 있고 이치코 자신이 새롭게 시도하는 것도 있다.

이치코에게 음식과 요리는 자신을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의 매개이자 현재의 자신을 버티는 힘이 된다. 성장한 이치코가 엄마를 이해하고,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 코모리에 남기로 결심하게 되는 동력도 결국 음식이라는 맥락 안에 있다.


그런데, 이치코가 나랑 닮았다고?



밥벌이의 고단함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음악을 시작했다. 대학원까지 합치면 음악공부만 자그마치 4년여를 더 한 셈이고, 그 후로 공연기획과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등의 일도 꽤 오래 했다. 물론 밴드에서 연주도 했고, 단편영화 음악 작업, 개인작업도 드문드문 이어왔다.

문제는 밥벌이였다.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수입이 해결되는 뮤지션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음악시장과 매체의 빠른 변화로 인해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대학 때 입시과외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강사라는 이름으로  타이틀만 바뀌어 졸업 후에도 이어졌다. 십수 년을 비정규직 입시강사로 먹고살다 보니 점점 지치고 환멸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속 가능한' 밥벌이가 절실했다.

'요리를 좋아하고, 사람들 먹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손도 꽤 빠른 편이니 식당을 해보자!'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시작된 제주살이


줄곧 살던 동네는 서울그중에서도 마포/홍대 인근이었다. 익숙한 그 동네에서 새로 시작할 가게 자리를 얻어보려 했지만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그 일대의 집세와 상가 임대료는 치솟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많은 조건들이 녹록지 않았다. 그즈음, 제주로 이주했거나 이주를 계획하는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제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건 아주 오랜 바람이었다. 그쯤 되니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남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아예 제주에서 식당을 열어보자'로 자연스레 계획이 옮겨간 셈이다.


살고 있던 연남동의 집을 당장 부동산에 내놓고, 제주로 이사하겠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호방하게 날린 후, 살 집을 구하기 위한 몇 달 간의 눈물겨운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섬 동쪽의 어느 마을로 '입도'한 것이 2016년 1월의 일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스무 살 이후부터는 대부분 신촌과 홍대 주변에서만 살아온 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주에서 '육짓것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던 그 날은, 육지에서 내려온 친구들을 처음으로 제주 집에 초대한 날이었다. 



자영업자가 되었다


2년 가까이 가게 자리를 물색한 끝에 월정리 해안도로에 접한 작은 창고를 임대했다. 지난한 공사와 복잡한 행정절차들을 마치고 가게를 오픈한 지 어언 1년 6개월.

나는 닭곰탕과 닭칼국수, 닭볶음탕을 파는 작은 식당, '월정곰닭'의 주인장이다새벽에 일어나 아침 8시에 문을 열고 오후 4시 영업을 마감할 때까지 주방과 홀과 카운터를 종횡무진하는, 사장이자 유일한 직원이다.


식당을 한다는 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내 음식을 먹이는 일이다. 그건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먹는 일, 먹이는 일, 음식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써보면 무궁무진 꽤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망설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글거리를 고르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다. 요리전문가도 아니고 인생을 달관한 어른도 아닌 내가, 그저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걸 명분으로 뭔가를 끄는  아무래도 두렵고 조심스러웠다.



엄마와, 엄마의 레시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때문이었다.

 속에는 나의 이야기, 가족과 친구들의 '먹고사는' 이야기도 담길 테지만, 무엇보다 엄마 이야기 하고 싶었다. 주방의 모든 것과 식재료를 고르고 손질하는 법, 식기를 다루고 정리하는 법과 칼 잡는 법을 알려준 엄마. 나의 첫 요리를 맛 본 엄마. 나의 식습관과 입맛과 취향을 만들어 준 엄마. 엄마와 엄마의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


다혈질이면서 예민한 나의 성격, 후각과 미각, 손맛, 늘 자초하는  일복, 도무지 음식을 조금씩 만들지 못하는 큰 손, 그 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 부지런과 오지랖 같은 것들은 DNA에 오롯이 담겨 엄마로부터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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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텃밭은 슬프게도 폭우와 장마 이후에 엉망이 되어 있다. 무성한 검질을 매고 물을 주고 먹거리를 풍성하게 수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영화 속 이치코의 모습이다. 나는 그녀와 달리 시간과 체력 늘 부족하.

그럼에도 나는 이치코의 그 심한 부지런함과 하릴없는 여유를 닮고 싶다. 말갛게 땀을 씻은 얼굴로 며칠 전 담은 술을 하아, 하고 한 국자 떠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목에 걸친 수건으로 그늘을 만들고 구시렁거리며 뜨거운 하늘을 원망하는 표정을 지어도 좋겠다. 무엇보다 음식으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엄마를 포함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좋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새삼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오늘은 기나긴 장마와 올해 첫 태풍이  막 지나간 7월 말, 성수기 문턱이다덥고 습한 휴일, 오랜만에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꺼낸 콩물을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키고 나서 브런치 포스팅할 첫 글을 썼다.


재미있 시작 되었으면 좋겠다.

기대해주시라.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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