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공작관의 고백
해가 어둑어둑 넘어가는 창밖으로는 선명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고 매섭도록 차가운 바람이 차창 틈으로 서글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제보자가 마음을 돌릴 수도 있다. 조금만 더 빨리 출발할걸. 오늘따라 창문에 비치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회는 거대한 눈 덩이랑 비슷해서 하면 할수록 더 커지기만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속도를 냈다.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다.
정말 사실인지 궁금해서였다. 2021년 1월. 당시 나는 인터콥이라는 선교 단체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송을 한창 제작하고 있었다. 방송이 약 1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 다른 제보자를 만나러 갈 처지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이 제보자를 만나보겠다고 나선 것은 정말 강한 끌림이 있어서였다. 인터뷰 촬영을 막 끝낸 늦은 오후. 나는 차를 급히 돌려 제보자 A를 만나러 내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제보자의 주장은 놀라웠으니까.
제보자가 얘기했던 대형 건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모델 하우스 같았다. 넓은 터에 이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있을 뿐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보자의 말대로 ‘그나마 안전한 곳’처럼 보였다. 제보자는 자신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국정원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통화가 감청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급하게 내달리던 우리는 곧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드나드는 차가 없어서인지 주변은 매우 조용했고, 새까만 주차장 바닥은 부산하게 흩날리던 눈으로 하얗게 뒤덮이고 있었다.
우리는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곳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리고 죽은 풀과 나무들이 엉겨있는 곳 뒤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멀리 산책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는 정도였다. 혹시 저 사람일까. 국정원 공작관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정장에 007 가방을 들고 다닐까. 살면서 내가 국정원 공작관을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떤 모습일지 전혀 상상하기 어려웠다. 늘 그렇듯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까.
어느새 눈이 그치고 무거운 구름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약속한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과 옷이 닿는 부위가 따끔 따끔하며 동시에 간질간질한 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차에서 내려 적당한 위치에 섰다. 제보자가 나타나면 우리 차에 태워 단둘이 은밀한 대화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들리세요?”
사실 나는 우리가 타고 온 차 외에 차를 한 대 더 준비했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나와 제보자를 촬영하도록 했다. 만나는 순간부터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그리고 이후 대화는 오디오만 담는 계획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오늘 이후 제보자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제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번 방송의 첫 장면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국정원 관련된 것도 제보해도 되나요?"
시작은 전화 한 통이었다. 제보자는 자신이 25년 동안 국정원에서 해외 공작을 담당했던 공작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위험한 상황이지만 꼭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허위 제보일 거라 생각했다. 말이 국정원이지 어디 국정원 직원이 언론에 제보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국정원 직원은 업무 중 취득한 내용을 외부에 발설할 수 없게 되어있다. 만약 이 제보자가 정말 국정원 직원이라면 적어도 목숨을 걸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문득 ‘자살을 당했다’고 뉴스에 소개됐던 다수의 국정원 직원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만큼 국정원은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가장 어두운 조직이니까.
탐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면 제보 전화를 자주 받게 되는데, 사실 이런 류의 제보 전화는 가끔 온다. 귀에 도청장치가 달려있다는 이야기나 정부 요원들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이야기. 곧 자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등등. 물론 누군가의 절실한 제보를 흘려들을 수는 없지만 한 시간 넘게 제보 내용을 듣다 보면 허탈하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이 외계인이라거나, 매일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로 끝나기 일수니까. 하지만 이번 제보는 조금 달랐다.
위안부 합의. 국정원. 일본 극우. 대선 개입. 미행.
무엇 하나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키워드들이었다. 특히 위안부 합의는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나눔의 집 후원금 문제를 두 편 다루면서 언젠가 꼭 위안부 합의의 실체를 다루는 방송을 제작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제보자의 전화는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위안부 합의의 실체에 조금 다가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여보세요?”
잠시 후 제보자와 전화가 닿았다. 이동 중에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둔다고 했었던 제보자. 추위와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저 멀리서 제보자가 나타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제보자와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우리는 꽁꽁 얼어붙은 몸을 덜덜 떨며 차에 올라탔다.
제보자는 작은 유에스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해온 노트북에 그 작은 유에스비를 꽂았다. 그러자 그 작은 유에스비에는 어떻게 이 안에 다 들어있었을까 싶을 만큼 거대한 이야기들이 한가득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속으로 그래 이런 운명도 있어야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들이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알아봐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든 알아낸다 한들 정말 이걸 내가 방송에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는 해가 완전히 넘어가다 못해 차 안에서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제보자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 묵직한 진실들을 차곡차곡 기록해오고 있었고 이미 꽤 많은 자료들을 정리해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제보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제보자가 확보하고 있는 근거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걱정보다는 훨씬 더 느낌이 좋았다. 물론 상대가 국정원이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제보자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나는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탓에 귀가 계속 빨갛고 뜨거웠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제보자는 무사히 댁에 도착하셨을까. 혹시 돌아가시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나. 혹시 나에게도 누가 따라붙은 것은 아닐까. 주차장에서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도 했다.
복잡할 때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우선 제보자가 얘기했던 “하얀 방 고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종일 온 곳을 누볐던 차가 다시 어둠을 헤치고 서울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쉽지 않은 취재에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음 편에 계속…
https://youtu.be/s3Xc5AQf0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