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까야 Jun 10. 2024

엘리스의 꿈


6년 동안 방송 일을 했다. 평생 프로그램을 만들며 먹고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티브이를 안 본다. 방송 업계가 곧 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발을 뺐다. 5개월 동안 티브이 방송을 멈추고 다른 분야를 도전해 봤다. 유튜브, 틱톡, 모임 등 내가 잘할 수 있어 보이는 것, 내가 재밌게 할 수 있어 보이는 걸 다 했다. 하지만 이제 고작 5개월. 수입은 얻지 못했다.


늘 그렇듯 오전 11시까지 잠을 다 소진해 버리고 일어난 뒤, 오늘은 뭐할지 고민하던 중 통장 잔고를 열어보는데 식은땀이 흘렀다. 잔고 첫 번째 자리 숫자가 바뀌기 일보 직전이다. 대처하지 않으면 곧 자릿수도 적어진다. 수명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실을 직시한 나는 바로 쿠팡물류센터에 지원했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들 때 지원하기로 보류해 놓은 마지막 카드였는데, 이렇게 일찍 꺼내게 될지 몰랐다. 제일 급여가 높은 물류의 중심 ‘허브’에 지웠했고, 작업 전날 합격 문자가 왔다.


작업 날 셔틀버스를 타고 인천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2시간 동안 기초 교육을 받은 뒤 일을 하기 위해 작업장에 들어갔다. 작업장은 마치 커다란 냉장고 같았다.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 위해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도 방한복을 입고 들어갔다. 방한모도 챙겨갔는데, 아무도 쓰지 않는 걸 확인하고 조금 민망해서 구석에 몰래 내려뒀다. 작업반장이 방한모를 들고 온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 수 있었다.


대략 30명의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같은 비정규직 사원들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의 명칭은 다 ‘사원’이라고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오는 쿠팡 로켓 배송 물건들을 빠레트에 싣고, 랩을 감는다. 그리고 우리가 밀봉해 놓은 짐을 계약직 사원이 지게차로 가져가는 아주 단순한 과정이다.


오후 10시가 되자 갑자기 봇물 터지듯 물건이 흘러 들어왔다. 사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셨다. 그때부터였다.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평소 나는 땀을 잘 흘리지 않는다. 실내 온도가 낮은 데도 불구하고 턱 밑으로 땀이 물건 옮기고 랩을 감는 노동이 너무 버거웠다. 방한복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추운 냉장고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방한모를 발견한 작업반장의 웃음은 아마 미래의 내 모습을 예견한 웃음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빠르게 가면서 느리게 갔다. 물건을 열심히 옮기고 랩을 감다 보면 1~2시간이 어느새 훌쩍 넘어버렸지만, 아직 퇴근까지 남은 시간이 깜깜하게 느껴졌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돈 걱정 안 하고 살던 어린 시절, 내가 방송 일을 선택했던 때, 방송 불경기에 취직을 못 해 외롭게 방황하던 작년, 이 순간을 글로 기록하며 알 수 없을 표정을 지을 미래의 내 모습까지. 만화 <드래곤볼>에서 단 하루 만에 1년의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정신의 방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여긴가. 고작 8시간 만에 30년 인생 전부를 훑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과 성별이 있었다. 나이가 많다고, 힘이 약하다고, 경력이 많다고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없이, 다들 본인 쪽으로 오는 물건을 열심히 날랐다. 내 아버지 또래의 중년도, 키가 작은 여자 사원도 똑같은 강도로 일을 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하겠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까다롭고 어지러운 래핑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바로 마무리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앞에 실어주길 기다리는 물건이 끊임없이 오고 있는데, 인상 찌푸리거나 험한 말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작업 현장에 들어가는 순간 평등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모두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바로 인천 냉장고 안에 있었다.


새벽 2시 가까스로 작업을 끝낸 내 몸이 2cm 정도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약한 어지럼증을 겪으며 퇴근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땀을 흘리며 하는 일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육체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토피아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잔머리 굴리며 돈 벌고, 상사에게 자존심 내어주며 열심히 살아가는 내 세계에 아직 조금 더 살아볼 용기가 생긴 것 같다.


꿈에서 깬 앨리스가 이런 기분일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모든 것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일지 실감하게 됐을 것이다. 가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할 때면, 사시사철이 겨울인 이상한 나라의 꿈을 꾸어도 좋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