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서 오름과 곶자왈 사이에 있는 서점을 찾았다. 구석에 오래된 전화기와 책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한창을 서성이다가 무언가를 쓰고 지나갔다. 차례 아닌 차례를 기다리다 그 앞에 섰다.
거기 놓여있던 책은 2018년 여러 전시에서 수집한 목소리를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했다. 전시에 참여한 관람객들은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를 걸어 하고싶었던 말을 건네고 대답을 받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전시가 종료된 후에 녹음된 목소리가 글로 바뀌었고 그렇게 모인 글이 책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뱉은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5년이 넘는 시간동안 곳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책을 살펴보니 짧게는 한줄부터 길게는 실제 통화라 해도 될만큼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짧은 글들은 대개 누군가를 증오하는 내용이었다. 대상은 헤어진 연인이 대부분이었다. 짧은 분량, 저주로 시작해 자기연민으로 끝나는 구성, 쏘아붙이는 문체가 대부분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다른 서가로 돌아서려는 찰나, 책 옆에 놓인 전화기가 시선을 끌었다. 단순한 소품인가 싶었는데 수화기를 들면 실제 녹음된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고민하다 수화기를 들었다. 나이가 많아봐야 갓 중학생이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소녀는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잘 계시냐고 물었다. 그리고 학원을 빼먹고 함께 있었던 날이 할아버지를 본 마지막날이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정말 몰랐다고 소녀는 여러 번 말했다. 소녀는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할아버지에게 몇가지 일을 설명했다. 울먹인 탓인지 주변이 시끄러운 탓인지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뒤이어 소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짜증냈던 일을 말했다. 너무 죄송하다고, 만약 그 날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아버지에게 몇번이고 사과했다. 소녀의 사과는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으로 끝난다.
몇 십년이 걸려도 기다릴 수 있으니 할아버지도 천국에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려 다시 만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천국에서마저 돌아가시면 그땐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다. 자신은 그 답을 모르니 절대 천국에서는 돌아가시면 안된다고,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녀는 "꼭 다시 만나요 할아버지"라고 밝게 인사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소녀에게 몇마디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전화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들면 다음 사람의 사연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려놓은 수화기를 다시 들지 못한 채 그 서점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