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이미 10년이 훌쩍 넘은 책 중에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거의 센세이션에 가까운 책이었고,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꽤 알려진 책이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는 이 책의 저자인 목사님을 초청해서 특별 설교를 듣기도 했다.
저자 목사님이 해 주신 설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모두가 무작정 내려놓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려놓기 위해서는 쌓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쌓아야 하는 대상은 정서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 외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했다. 쌓은 것이 없으면 내려놓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려놓을 만큼 채운 것이 있나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기다리던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는데도, 나는 계속 실패하고 그때마다 번번이 무너졌다. 괴로워하는 내게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해 주었던 말은 바로 “내려놓아야 찾아온대.”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너무도 간절히 기다리는 내 마음이 내려놓아야 하는 욕심이라는 건지,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아이가 생길 거라는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내려놓는 것인지. 이런 문제에 ‘내려놓음’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 얘기하며 속상해하는 내게 오랜만에 만난 사촌 언니는 “그렇게 말만 꺼내도 울컥하고 징징대는 거면 너는 아직 한참 더 내려놔야겠다. 아직 멀었어.”라고 말했다.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동안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남편은 힘들어하는 나를 안쓰러워했지만 실제로 내가 얼마만큼이나 힘든지는 다 알 수가 없었다. 미혼이었던 친구와 선배와 후배는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겼고, 함께 난임의 과정을 겪어나가던 지인들조차도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이가 생겼다.
말로는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순간마다 수없이 무너졌고, 시험관 시술이 시행되는 모든 단계에서의 반복되는 실패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매일 적어도 3개 이상의 자가주사를 놓아야 했던 배 위는 보라색 피멍으로 뒤덮였고, 멍이 사라진 다음에도 어느 곳을 찔러도 묵직한 통증이 찾아왔다. 수면마취가 늘어날수록 기억력은 감퇴되었고, 채취한 다음 날까지 배는 쓰라리게 아팠다.
신체적으로도 괴로웠지만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생애주기별 과업에서 도태되었고, 실패자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호르몬 주기와 병원일정을 맞추어야 해서 내 삶에서 스스로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견뎌냈던 건 아이가 찾아올 것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바라는 일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내려놓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진짜 내려놓고 싶다.”
결국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나서야, 나는 병원 시술을 내려놓았다. 병원을 그만 다니기로 했지만 아이를 원하는 마음까지 내려놓아지지는 않았다. 매번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근데 그마저도 ‘아무리 노력했어도 제대로 된 결과가 없다면 노력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 나는 남들이 보기엔 실패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영원히 기다리는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을 부정당한 기분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뭐라든 나는 분명히 그분의 약속을 받았고 포기할 순 없다. ‘조급한’ 마음은 내려놓고 ‘어려운’ 마음도 '속상한' 감정도 잠시 미뤄두고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 보기로 했다.
내가 믿는 분은 어떤 일이든 ‘못’하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이해가능한 범주를 뛰어넘는 이유로 ‘안’ 하기로 결정하실 수는 있겠다. 또 그분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솔직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두렵지만 가능성이 너무도 낮지만 적어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진짜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다. 내 힘으로 해 보겠다며 위로 쌓아 올렸던 수많은 '숫자 8'들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내려놓은 숫자가 '무한대'의 가능성이 되어 돌아와 주면 좋겠다. 그렇게 끝까지 노력하며 내게 찾아오고 있을 내 아이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준비되는 시간이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