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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06. 2024

태초의 바다

아주 오래전, 아홉 개의 강이 흐른다는 곳에 물놀이를 갔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귓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을까 긴장해서 귀를 한껏 접어 눌러 막고는, 물 안으로 고개만 살짝 집어넣곤 했었다. 


   그다음으로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물 위에 엎드렸다. 온몸의 힘을 빼고 그저 물의 흐름에 맞추어 등으로는 뜨거운 햇살을 받고, 몸은 시원한 물속에 잠겨 있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가장 좋았던 건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간 수영장에서 물속에 잠수해 들어갔을 때였다. 물속은 고요하고 먹먹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 사라지고, 오직 내 숨소리만이 집중되어 들렸다. 그 자체로 고요한 평화가 느껴졌다. 


   가끔 나를 둘러싼 모든 소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날의 고요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매번 물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손바닥으로 귀 전체를 감싸듯 덮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손바닥이 귓바퀴 위를 덮으면 신기하게도 그날의 물속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잠잠해지는 일순간의 고요.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나의 숨소리뿐인 세계. 엄마의 뱃속, 내가 열 달 동안 자랐던 태초의 바닷속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작디작은 점 하나가 되었다. 불안이라고는 알 수 없던 시절의 태아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로 근원에 가까운 평화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랜 시간 불안에 시달려 온 것 같다. 그 수많은 불안의 시작도 끝도 언제나 하나로 같았다. 내가 믿고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실체도 없는 불안과 두려움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들과 맞물려 점점 제 몸집을 불려 왔나 보다. 애초에 누구도 믿지 않았어야 하는 걸까, 때로는 약아빠지게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했어야 하는 걸까.


   나 혼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 앞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자책이고 자학이었다. 수많은 '만약에'가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만약에' 내가 좀 더 사랑스러웠다면. '만약에' 내가 더 착한 아이였다면. '만약에' 내가 뛰어나고 자랑스러울만한 성적이라면. '만약에' 내가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면. 수천수만 개의 '만약에'는 오히려 나의 불안을 점점 키웠고 급기야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괴감만이 가득했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았던 유일한 희망 같은 건 내 인생에는 없는 단어였다. 


   태중에 열 달을 품고 똑같이 소중하게 자랐을 텐데 왜 유독 내게는 불안이 크게 자리한 걸까 나름대로 심리적인 원인들을 스스로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한 가지 원인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서 크게 서너 가지 정도의 근원을 의심해 볼 수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그 근원을 파헤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에 마침내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알아채고, 들어주고, 조절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다 성장했으니 새삼스레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내가 바라는 평온은 누군가 다른 이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잔뜩 날이 섰던 마음들을 다독이고 진정시키고, 스스로 해소할 수 있는 활동들을 찾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명확한 해결법이다. 


   아직 오지도 않은 먼 미래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 보기로 다. 늘 그리워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주 가기 힘든 바다 대신 일단 양손으로 귀를 덮고 내면의 고요에 잠겨 심호흡을 해본다. 마치 태초의 바닷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내 안에서 미쳐 날뛰는 나를 해소하고, 평온을 되찾는 연습을 한다. 


   온갖 소리들이 고요해지고 잠잠해지고 먹먹해지면, 나를 가장 괴롭히던 문제도, 갑갑하던 마음도, 무거웠던 감정들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스스로를 돌봐주어야겠다는 다짐으로 매일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흐트러지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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