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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9.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것이다

코코, 2018

내가 기억하는 죽음에 대한 첫 대화는 대여섯 살쯤, 외할머니와 따뜻한 아랫목에서였다. 사람이 죽는 건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잠드는 거랑 비슷할 수도 겠지.' 하고 대답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혹은 어리니까 더더욱) 온 순서대로 가는 거겠거니 하는 마음에 "할머니는 얼마나 더 살아?" 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잠들 듯이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기억도 뚜렷이 난다.


그로부터 십 년쯤 뒤, 어느 새벽 할머니와 작별을 했다. 무슨 일에 정신이 팔렸었는지 할머니가 아프신 동안 나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러면서 혼자 남겨진, 그리고 나와 가장 각별했던 외할아버지와의 남은 시간은 소중히 보내겠다고 다짐했었다. 또 그로부터 십 년쯤 뒤, 어느 겨울 새벽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할머니 때와 달리 3일 내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며 온전히 할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두 분을 가족묘에 나란히 모셔드리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는 새벽에 가셨으니, 잠들 듯 가셨을 거라고 혼자 상상했다.

 

어찌 보면 할아버지와의 작별은 거의 십 년 가까이 준비를 해왔는데, 상실의 아픔이 조금도 덜하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두려워졌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죽음은 나와 먼 이야기라고 느꼈고, 내 오늘내일이 가장 중요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런데 웬걸, 늙어가는 것만 바라봐도 눈물이 날 만큼 죽음이 두려워져 버렸다. 특히나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 것인지보다 앞으로 나의 죽음보다 더 자주 겪게 될 타인의 죽음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종종 쓸쓸해하셨다. 아무리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50여 년 만에 부모와의 영영 작별을 경험한 엄마의 심정을 나는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다만 슬픔이 나누면 과연 덜해질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채 감히 부모의 빈자리를 자식이 눈곱만큼이나 마 메울 방법을 고민하며 내 몫의 슬픔을 겪었다. 그맘때 혹은 할아버지와 작별한 지 두 달 뒤쯤, '가족 중에 누가 제일 좋아?'라는 나의 유치한 질문에 자기 강아지라고 답하던 친구가 17년 함께 산 반려견을 떠나보냈다. 몇 년을 본 친구인데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봤다. 나는 또 한 번 도대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라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심지어 조금 극단적으로는, 아예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아닌가 라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그런 감정에 무겁게 잠겨 있던 나에게 <코코>는, 뜻하지 않은 순간에 만난 큰 위로였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통해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맞바꾸어야 할까 라는 질문을 떠올리기도 했고, 누군가는 불편한 전통으로 퇴색된 제사의 취지에 대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고도 했다. 나에게 <코코>는 다른 무엇도 아닌 위로였다. 가끔 너무 좋은 영화는 나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코코>는 내 마음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서 내게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억하는 한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고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너무 소중히 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내 삶에 누군가를 새로이 만날 일보다, 떠나보낼 일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사실 이런 비교조차 의미가 없는 게 새로운 생명을 만나게 된다고 사랑했던 이의 죽음과 등가로 위안을 받지는 못한다) 헤어질 일만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기에는 세상에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나 강아지나 조금 깊게 관계 맺는 것들에 마음을 나눠줘 버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상실의 고통을 줄여보겠다고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삶이 결과적으로 사랑과 상실을 실컷 겪은 삶보다 더 잘 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한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우리는 종종 '그래도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히 가셨으면 잘 된 거다.'라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어떤 순간 행복했을까? 내가 아는 한 할아버지는 우리가 별 일 없이 전화를 드렸을 때 기뻐하셨고, 명절에 뵈러 갔을 때 차에서 내려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갈 때 가장 환한 얼굴을 보이셨다. 할아버지가 가신 뒤 제일 후회되는 건 몇 번 더 전화드릴걸, 몇 번 더 뵐걸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후회 없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어차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데 쓸 데 없이 사랑했다'라는 건 없다고 믿기로 했다. 언제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데 쓰는 것이 더 값진 일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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