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Aug 03. 2019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리틀 드러머 걸, 2019

 몇 달 전 왓챠플레이에서 <리틀 드러머 걸>을 독점으로 공개했다. 넷플릭스에서 공장처럼 찍어내는 오리지널들에 조금 싫증이 난 무렵이라 더욱 반가운 소식이었다. 강렬한 서사가 2시간 안에 휘몰아치던 박찬욱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사실 몰입도 면에서 조금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의도된 건지는 몰라도 끊어가기 신공도 그리 치사한 수준까진 아니어서(?) 중독성은 별로 없는데 먹다 보니 바닥이 보이는 과자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이 그래도 내게 좋았던 이유는 그간 존 르 카레 원작으로 잘 알려진 많은 영화들보다 긴 호흡으로, 더 깊게 작품을 담아낼 수 있었던 데 있지 않나 싶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나 <모스트 원티드 맨>과 같은 걸작들은 단 두 시간 안에도 여운이 참 길었지만 유일한 아쉬움이 여러 인물들에 대해 충분히 몰입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몇 번을 돌려서 다시 봐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입체적인 인물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고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이번 <리틀 드러머 걸> 은 충분히 이야기 안에 빠져있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여러 번 다시 보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나는 찰리가 되었다가, 가디가 되었다가, 쌀림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드디어 칼릴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의 정보국에서 일어나는 첩보극이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민족들의 환부를 들여다보는 소재여서 조금 더 깊이 마음 아파하며 이입할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주인공 찰리는 불 같은 성격의 배우이다. 당시 영국에는 상류층과 워킹 클래스가 있는데, 그녀는 상류층 출신이지만 노동자 계급 친구들과 어울리며 '돈 안 되는 예술'을 하는 극단 소속의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극단 멤버들이 비밀스러운 후원자로부터 그리스에 오라는 초대를 받으며 찰리와 가디의 만남은 시작된다. 찰리는 그리스에서 직접 말을 걸기보단 늘 곁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가디가 영국 공연 때부터 자신을 지켜봐 왔던 훤칠한 미모의 남성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가디에게 이끌린 찰리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레스타인과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의 첩보 작전에 배우로 투입돼 있다. 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지도자 쌀림의 연인 행세를 하는 것.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그를 사랑해야 한다. 찰리가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얼굴이 개연성 그 자체인 가디가 대신 쌀림 행세를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찰리를 준비시킨다.


 이 영화는 찰리가 무엇 때문에 그 역할을 맡는지 뚜렷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지시에 따르는 인물이라 보기도 어려운 것이, 가디도 없고 더 이상 상부의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찰리는 쌀림의 연인이자 팔레스타인의 혁명군으로서 흔들림 없이 역할을 수행해 낸다. 관객조차도 '엥... 혹시 원래 진짜로 쌀림이랑 뭐 있었던 것 아냐? 알고 보니 영국인이 아닌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판단으로 팔레스타인의 군인이 되어 행동한다. 때로는 혼란스러워하면서, 또 때로는 확신에 넘쳐서.


 <리틀 드러머 걸>이라는 제목은, 전쟁에서 북을 치는 소년에서 따온 제목으로 낭만에 이끌려 참혹한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순진한 아이, 혹은 어른들에게 이용당하는 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대사는, 작전이 끝난 뒤 시간이 지나 가디를 다시 만난 찰리의 입에서 나온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그 상황에서 달리 가디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러면서도 알쏭달쏭하다. 여태 자기가 누구인지도 고찰해 보지 않고 그렇게 척척 상황 판단을 했단 말이야? 아마도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나는 종종 그 대상이 불분명한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뉴스를 보며 딱히 누구를 탓하는 것도 아니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막연히 무언가가 그리운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애달파지기도 한다. 어쩌면 찰리도 막연한 열정과 분노를 품고 있다가, 가디를 만나 열정을 쏟고 쌀림의 이야기를 통해 팔레스타인 민족의 애환에 깊게 공감하면서 분노를 비롯한 온갖 감정들이 폭발하지 않았을까. 쌀림의 연인으로서 한 차례 연극을 마친 뒤, 다시 가디를 마주했을 때 찰리는 익숙하고 정다운 설렘을 느꼈을까, 혹은 오늘 처음 만난 듯 낯설었을까. 그 연극을 지나오는 동안, 찰리는 성숙했을까 아니면 소모되었을까. 한 개인이 상황에 휩쓸릴 때, 그를 통해 성장했다는 말과 소모되었다는 말이 얼마나 다를까. 자신이 일으키지 않은 전쟁에서 북을 치던 소녀는 전쟁이 끝나면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