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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형 Mar 24. 2020

마인드 더 갭 Mind the Gap

틈새와 간극, 런던 지하철과 삶과 번역에 대한 소고


삶이라는 이 불완전한 사업, 내밀한 관계맺음의 끝없는 실패, 끝없는 오류와 결별로 구성되는, 어찌됐든 결국은 상실로 정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삶의 양태에 관하여....      
-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수채크레용으로 그렸던  <베이커스트리트역>



런던을 회상하면 나는 가장 먼저 지하철을 떠올린다. 순전히 분초를 헤아려보더라도, 도서관을 제외한다면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이 지하철의 역사와 객차일 것이다. 낯선 도시를 부지런히 떠도는 부초답게 날마다 꾸역꾸역 집밖으로 나와 어디선가 출발해 어디론가 달려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선명하게 어디서나 시야에 들어오는 단순한 언더그라운드의 로고. 흰색 파랑 빨강, 그리고 원과 네모, 단순하지만 어디서나 눈에 띄는 명료한 디자인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지금 어디에 있든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보장으로, 아직 길을 잃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어디에나 있는 지하철이지만 런던의 지하철이 특별한 이유라면, 세계 최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런던은 현대적 메트로폴리스의 혜택과 병폐를 모두 선도해 왔다. 좋든 나쁘든 런던이 밟은 길을 무수한 세계의 도시들이 따랐다. 전대미문의 대기오염과 도시빈곤, 스펙터클과 쇼로 화한 정치, 그리고 물론, 땅 밑으로 기차가 달리게 만든다는 천지개벽할 구상 역시 처음으로 실행에 옮겼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지하철 역시 처음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이질적이고 생경하고 부자연스럽고 위험했으며, 따라서 경이로웠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런던에서 과학이 아니라 환상과 마술로 포장되어 첫 선을 보였다. 지상을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어느 순간 땅을 파고 들어가 연기처럼 사라지면 둘러선 구경꾼들이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다. 드라마와 스펙터클에 열광하는 도시 런던은 ‘팬터마임의 악마처럼 자취를 감추는’ 이 전대미문의 교통수단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횡단과 월경(越境), 그리고 정복이야말로 근대 서사의 본질이므로 길 없는 길을 뚫어 달리고 미지의 공간을 팽창하는 도시로 편입시키는 지하철은 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런던의 지하철 시스템은 미국처럼 ‘길’에 방점을 찍는 ‘서브웨이subway’가 아니라 지하라는 공간을 통째로 지칭하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고 부른다.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이 표상하는 지하세계의 정복은 달의 정복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근대가 신화를 학살하고 과학을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과학이 뚫어낸 땅속의 지름길이 (통과의례로서) 죽음을 담보하고 있다는 의식적 무의식적 인식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90년 킹 윌리엄 스트리트에서 스톡웰까지 개통한 런던 최초의 전철은 “자르고 덮는” 과거의 굴착방식과 달리 최초로 터널 공법을 도입해 ‘튜브’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전철의 객차에는 아예 창문이 없었다. 아무도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암흑의 지하 풍광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휙휙 스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물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것’이 없기도 하지만, 인간의 집단무의식에서 지하는 늘 어둠의 세계, 저승이고 망자의 세상이었다. 목적지로 직행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행위는 저승을 통과하는 길을 통과하는 의례라는 은유가 발현한다. 저승을 눈으로 ‘본’ 자는 에우리디케처럼 하데스의 세상에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은 창문 없는 객차로 표출되었다.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하데스의 지하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존재는 신들 중에도 드물었다. 언더그라운드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흑 속에서 생떼 같은 목숨을 잃었으므로 단순한 은유만은 아니다. 탐욕스러운 도시는 땅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죽음의 신 하데스에게 피의 제물을 바치고 지하 통행권을 차지했다.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마법의 지름길은 런던의 상징으로 건재하다. 펄떡이는 도시의 혈류를 싣고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며 이곳과 저곳 사이를 치달리며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길로 데려다준다. 오늘날 런던 언더그라운드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경고문이 있다.      

Mind the Gap, Please.       

간극을 조심하라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열차가 지하로 내려가면 여전히 아무도 창밖을 보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 유달리 머나먼 타지로 떠나는 모험담에 탐닉했다. <둘리틀 선생의 모험기>, <15소년 표류기>, <비글 호 항해기>, <로빈슨 표류기>, <스콧 남극 원정기>, <보물섬>, <에베레스트 등정기>. 책장에 손때가 묻고 누렇게 바래고 닳아 해져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으며 백일몽에 빠져 사진 한 장 본 적 없고 오로지 언어로만 묘사된 상상 속의 풍광을 하염없이 눈앞에 그렸다.      


크레바스.      


<스콧 남극 원정기>와 <에베레스트 등정기>에는 흑마법의 주문 같은, 생경한 이국의 단어가 나왔다. 알파벳도 한 글자 모르지만 그 단어의 발음이 마음을 잡아끌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말을 입안에서 혀로 굴리면 단조로운 주공 아파트 단지의 풍경은 셀로판지처럼 반투명해지고, 위험천만한 이국의 설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세계에서 가장 놓은 설산을 오르고 스콧 원정대가 극점을 찾아 남극의 망망한 설원을 가로지를 때 맞닥뜨린 장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건만 역어가 없어 원어를 그대로 쓴 ‘크레바스’가 꼬마 몽상가의 백일몽을 휘어잡았다. 생경한 발음과 날카로운 어감, 낯설어서 무섭고 아름다웠던 그 말은 세이렌이나 사이클롭스 같은 신화 속 괴물의 이름과 다르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순백의 설원, 단단하게 다져졌다고 믿고 있던 만년설과 빙하가 순식간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심연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젊은 탐험대원들이 자칫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실제 크레바스의 사진 한 장 보지 못했건만, 오로지 모험담의 언어로만 묘사된, 그 소름끼치게 깊은 상처 같은 틈새는 성장기의 판타지를 거침없이 수놓고 찢었다. 하늘에서 칼로 벤 자상 같은 설원의 크레바스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내가, 혹은 사랑하는 대원이 그 무서운 간극에 빠져 끝없이 낙하하는 악몽을 꾸었다.      


우리를 갈라놓는 허공, 너와 나를 이별하게 하는 사이. 아가리를 벌린 시커먼 심연, 끊어진 다리, 망각의 강. 


알파벳의 A도 모르는 꼬맹이에게 크레바스는 아무 뿌리도 맥락도 없는 철저한 타자의 언어였다. 그 절대적인 타자의 언어가 상정하는 거리가 무섭고도 매혹적인 크레바스였다.       


사십 년이 흐른 후에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찾아와서 런던을 순환하는 서클 라인의 지하철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던 차창의 풍경이 패딩턴 역을 지나 지하로 들어가며 새까만 어둠으로 대체되자, 퍼뜩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크레바스. 


깊고 위험하고 매혹적인 틈새. 그 시커먼 틈새로 추락하면 언더그라운드.      


언어와 언어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에 파인 깊고 깊은 골. 뜬금없이, 번역이야말로 심연 같은 크레바스를 건너는 줄타기, 아니, 심연을 가르는 지하철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흔 아홉 번째로 맞은 가을에 혼자 무작정 런던으로 떠났다. 그간의 삶을 안온하게 규정해주던 딱딱한 소속감의 껍질들이 허물처럼 하나 둘, 차례로 벗겨져 떨어지고 앙상한 나의 내면이 훤히 드러난 계절이었다. 오래 몸담았던 대학과 학계를 떠나며 알량한 월급의 위로도 사라졌고 흐물흐물한 시간을 따박따박 교시와 학기로 구획해주던 강의의 규율도 사라졌으며 선생의 체면과 보람도 덧없이 어제의 기억으로 물러났다. 언제까지나 품안에 있을 줄 알았던 딸아이도 어느새 당찬 어른이 되고 ‘엄마’라는 이름의 의무와 특권도 자연스레 어깨에서 내려놓아야 했다.      


나라는 인간을 편리하게 대변해주던 사회적 정체성의 간판들을 자의반 타의반 내리고 나자 덩그마니 남은 자아의 알맹이가 갑각류의 속살처럼 흐물흐물 형태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흡사 눈가리개를 하고 코앞만 보며 수레만 끌며 살다가 덥석 대평원에 풀려난 짐말이 된 느낌이었다. 등짐을 내리고 고삐를 풀고 마지막으로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까마득한 지평은 무한한 가능성의 아름다움 이전에 소름끼치게 불안한 공포로 다가왔다. 질주를 그치고 눈을 들어 세상을 보자 팽창한 시간과 축소한 공간이 둘 다 무서웠다. 시원한 희열이 아니라 헛헛한 허탈과 막막한 절망이 스산하게 스며들었다. 때가 되면 내려야 할 등짐에 알량한 존재의미를 걸고 살다가 대평원의 바람을 맞는 쾌감을 잊은 짐말처럼, 이제 무엇을 찾아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번역자. 

글을 옮겨 적는 사람. 


그 이름이 내게 남은 마지막 딱지고 이정표였다.      


하지만 번역자라는 정체성은 닻을 내리고 비바람을 피할 안락한 방파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번역은 무소속 무정형으로 오류의 암초를 피해 거친 바다를 떠도는 항해자의 불안을 내면화한다. 독자도 작가도 아닌 ‘사이’에서 줄을 타는 존재.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어와 한글 사이를 부유하는 중간의 기호. 그 아슬아슬한 이름에 둥지를 틀어버릴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사이의 공간을 항구적인 주소로 삼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외풍을 막아줄 좀 더 안전한 이름을 찾아서 소라게 껍질처럼 마음 편하게 지고 다니고 싶었다. 닿을 수 없는 강둑으로 건너가려고 영원히 버둥버둥 헤엄치고 싶지 않았다. 철통 요새처럼 안온한 사회적 범주의 장벽을 찾아 숨고 싶었다.                





               

파르르, 유난히 승강장이 가파르게 휘어진 피카딜리 서커스 지하철역. 열차보다 바람이 먼저 도착했다. 열차의 출입문이 열리자 오늘도 어김없이 낭랑하게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Mind the Gap. Mind the Gap between the Train and the Platform.       
간격을 주의하세요.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에 주의하세요.      


지하철이 그물망처럼 발달한 런던에서 날이면 날마다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 안내문. 하지만 문득, 그날따라 그 문장에 담을 수 있는 여러 다른 의미의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이 문장이야말로 런던의 장소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상한다는 사실도.        







Mind는 본질적으로 영국적인 동사다. 미국 영어에서 동사로서 mind는 ‘Never mind.’라든가 ‘Mind your own business.’ 정도의 숙어로만 용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mind는 다양한 문장에 응용이 가능한 독립적 동사로 살아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의외로 다양하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른 정의는 이러하다.           


1) (보통 의문문이나 부정형으로) 신경 쓰이다. 짜증이 나다. 싫어하다. 열의가 없거나 의욕이 나지 않다. ex. Do you mind my sitting here? 

2) 중요하게 여기다. 유념하다. ex. Don’t mind the poll result. 

3) 보살피다. 유심히 관찰하다. ex. Mind the babies. 

4) 조심하다. 

5) 상기하다. 기억하다. 

6) (수동형으로) ...를 할 마음이 생기다.           


말하자면 영국영어에서 동사 mind는 조심하면서 관찰하고 유념하고 보살피는 행위를 대체로 아우른다. 아기를 돌봐주는 사람, 베이비시터babysitter를 영국에서는 차일드마인더childminder라고 한다. 미국영어의 watch out과는 달리 mind는 단순히 주의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 행하는 모든 일을 아우르는 어감을 띤다. 따라서 Mind the Gap이라는 당부는 우리가 Gap을 바라보는 통념을 재고하도록 요청한다. Watch out이 아니고 Mind라는 동사와 결합할 때 틈새와 간극은 위험할 뿐 아니라 주의하고 고찰하고 보살펴야 할 ‘중요한 공간’으로 올라선다. 충돌하고 허물어지고 소실되는 지점일 뿐 아니라 타협하고 변화하고 만나고 새것이 생겨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고, 소실, 충돌, 소통, 발견, 타협과 만남. 말하자면 이 세상 모든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시공간의 장소가 된다.


그러니 MIND THE GAP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무난하게는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을 조심하세요.’로 옮겨야 하겠지만 <서울>의 지하철에서 울려 퍼지는 이 표준 안내문으로 옮기는 선택을 하는 순간 <런던>의 장소성은 지워지고 이런 저런 생각들로 갈라지는 풍부한 서브텍스트도 시커먼 두 언어의 틈새로 떨어져 버린다.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메우고 이을 수 없는 심연에 가교를 놓겠다고 버둥거리는 번역이 얼마나 환원적인 작업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더 나은 번역은 있어도 완전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번역은 불완전의 사업 그 자체고 관계 맺기의 끝없는 실패요, 오로지 상실로 정점을 찍는다.      

 어쩌면 번역은 삶을 꼭 빼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손을 내밀고 닿고자 버둥거리는 몸짓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안락한 소속감과 단단한 발판을 그리 쉬이 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불완전하다 해서 삶과 관계맺음의 노력을 송두리째 포기하거나 무의미한 실패작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번역도 불완전하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오역과 오류는 번역에 천형처럼 따라붙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앎도, 인간의 언어도, 인간의 소통도 불완전한 탓이다. 우리가 사유와 감정을 언어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는 것처럼 한 문화와 언어가 다른 문화와 언어로 완벽하게 넘어갈 수는 없다. 따라서 번역은 언제나 괴리와 사이에 존재한다. 틈새와 간극이 번역의 자리다. 저 멀리 강둑을 향해 헤엄치고 저 건너편 벼랑으로 넘어가려 밧줄에 매달려 몸을 던지는 순간, 번역은 그 무한수렴의 움직임에 존재한다. 결코 닿지 않는 건너편에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 사력을 다하는 순간에만 머문다, 서글프게도.  

     

하지만 GAP이 아닌 다른 어떤 장소에서 만남이 가능한가? 만남은 언제나 무한한 수렴의 몸짓일 테고, 소통은 언제나 무한한 타협의 결과일 텐데. 서로 다른 언어가, 문화가, 사람이, 또 장소가, ‘사이’가 아닌 어느 자리에서 서로와 닿을 수 있을까.        


간극과 괴리를 훌쩍 뛰어넘는 완벽한 소통이 존재하는가? 네가 내게로, 내가 네게로 훌쩍 뛰어 건너가는 건 불가능한 이상이다. 현실적으로 주체와 타자의 조우는 언제나 회색지대에서 무수한 빛깔의 채도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이에서 조우하기 위해 주체도 변하고 타자도 변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김은 언제나 변신을 수반한다. 아무 상처 없이, 손상 없이, 희생 없이, 크레바스를 건너뛰는 꿈은 미망이다. 그러므로 이 언어를 저 언어로, 이 문화를 저 문화로 옮겨 만남을 주선하는 중매가 번역자의 일이라면, 새 양복 한 벌을 기대하기보다 따귀 맞을 각오부터 다지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줄을 타고 크레바스를 건너뛰고 다리가 끊어진 강을 이어 양편을 사이에서 만나게 하고자 버둥거리는 분투는 상처투성이일망정 허무하지 않다고 믿는다.      


목숨을 걸고 극점으로 다가가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쓸쓸하게 얼어 죽은, 어설프고 현실 감각 없는 스콧 원정대의 모험담이 기어이 타국의 셰르파를 닦달해 제국의 깃발을 꽂은 힐러리 경의 에베레스트 등정기보다 더 기나긴 여운을 남겼듯, 결국 새로운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사이’의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기를. 오류와 소실, 오해와 왜곡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끝내 여기저기 다치고 해져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라도, 의미 있는 조우를 성사시킬 수 있기를.      



Mind the Gap, Please.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심드렁한 안내문이 귀에 꽂혔다.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오가면서 두 언어와 문화의 사이에서 배회하는 시간을 흘려보내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번역자의 정체성을 온전히 껴안을 용기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의 전령 헤르메스는 역치와 경계의 신이다.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헤르메스는 전령으로서 언제나 ‘사이’에 존재한다. 헤르메스는 유일하게 자유롭게 지하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신이었다. 하데스와 인간의 지상, 천상의 올림포스를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역치와 경계를 넘는 헤르메스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비로소 소통한다. 자칫 저승으로, 심연으로 추락할 위험을 안고도, 건너고 가로지르고 도달하고자 분투한다. 발을 헛딛고, 미끄러지며, 가끔은 틈새로 많은 것들을 빠뜨리면서.      


다만 틈새로 유실된 모든 것은 그저 허무한가? 이곳과 저곳 사이, 땅 밑의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런던의 언더그라운드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시민의 은신처가 되어준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영국 정부가 언더그라운드로 피신한 시민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다시 지상으로 나와 싸우지 않을까 봐, 혹은 시민들이 지하에서 급진적 정치사상에 물들까 봐 진심으로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처칠 내각에서 교통운송과 보급물자를 관장했던 정치인 허버트 모리슨은 1944년 가을 “밤낮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죽치고 지내는 행위를 권장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신이 지상으로 번지면 우리는 패배한다.”고 말했다. 보수 정치권은 한편으로 지하가 지상의 체제가 전복 가능하다는 반 권위적 급진주의와 공산주의의 온상이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말하자면 지상의 지배자들은 제도권과 안온한 현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약화시킬 변혁의 가능성을 지하에서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그래서인지 현대화되면서 지하철의 공간과 객차는 점점 더 밝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오래된 서클과 피카딜리, 센트럴 라인에 넘쳐나는 관광객들, 아침저녁으로 쥬빌리 라인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직장인들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결연하게 어두운 차창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면 노숙자와 도둑, 마약중독자들이 포화를 피해 도망치는 시민들처럼 땅 밑으로 기어들어 빛이 없는 공간을 집이라 부른다. 언더그라운드는 여전히, 이곳에도, 저곳에도, 어디에도 속할 곳 없는 자들을 품고 있다.               





  

노팅힐의 라드브로크 그로브 역은 정말로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넓을 뿐 아니라 단차도 유달리 크다. 열차에서 내릴 때는 꽤 높은 계단을 오르듯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꼭 주고 영차, 하고 올라서야 한다. 런던에 살거나 돌아다니려면 뻔질나게 드나들 수밖에 없는 피카딜리 서커스 역사의 아찔하게 휘어진 승강장에는 사람 하나가 너끈히 훅 빠져 떨어질 정도로 열차와의 간격이 넓은 지점들이 눈에 띈다. 이런 역사에서 GAP은 안내문보다 먼저 눈에 띌 정도로 뚜렷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간극이 잘 보이는 역사에서는 사고가 별로 없단다. 승강장과 열차 간격이 눈에 띄지 않는 역사에서 발목이 끼거나 핸드폰을 빠뜨리는 사고가 잦단다.      


정말 위태롭고 의미심장한 틈새, 그래서 항상 유념하고 보살피고 조심하고 관찰해야 하는 간극. 진짜 중요한 GAP은 우리 눈에 그리 쉽게 띄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중요한 일들은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MIND THE GAP,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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