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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형 Sep 27. 2023

<지미스 홀> @ 더블린, 애비 씨어터

사랑과 예술의 급진성에 대하여


노래하고 춤출 수 있다면, 어떤 역경이든 헤치고 살아남을 수 있어. 
If you can sing and dance, you can survive anything.      
연극 <지미의 강당Jimmy’s Hall> 중에서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마침 손에 들려 있던 책은 <사랑의 급진성>이었다. 레닌은 음악을 사랑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는 음악의 희열을 경계했다. 그래서 1920년 모스크바의 막심 고리키 자택에서 러시아 출신 유태인 피아니스트 이사이 도브로멘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감상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곡은 기꺼이 매일이라도 들을 수 있지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놀라운 음악이니까요. 이 더러운 지옥에 살면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어리석은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어서는 안 되지요. 당신의 손을 물어뜯을 테니까요.           


정치와 예술, 권력과 사랑의 미묘한 관계를 이토록 솔직하고 명료하게 정리한 토막글은 찾기 어렵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굳어진 더께를 뒤흔들 때, 에로스는 혁명의 편에 선다. 하지만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체제가 새로운 기득권으로 굳어지면 춤과 노래와 시와 문학과 사랑의 희열은 휴화산처럼 은근하게 들끓는 잠재적 위험이 된다. 더블린의 애비 씨어터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펴 “무서운 아름다움을 탄생Terrible beauty is born.”시켰듯이.                  



          




더블린은 수평의 도시다. 마천루가 풍광을 장악하지 않는다. 글로벌 프랜차이즈와 화려한 상가들이 이제야 한창 생겨나고 있는 좁은 구도심은 근현대까지 잉글랜드에 착취당하며 겪어야 했던 끔찍한 가난의 굴레와 비극적 궁핍을 온전히 숨기지 못한다. 언제나 반짝이고 미혹하며 한창 하늘로 치솟고 급속도로 어딘가로 달려가는 런던에 비하면, 낮고 초라하고 조촐하며 칙칙하다. 그리고 수평의 소박한 풍광 속에, 그 위에, 그 옆에, 그 저변에, 수직도 수평도 아닌 제 4의 차원이 있다. 세계 최고의 입담을 자랑하는 이야기꾼들이 엮어낸 끝없는 이야기의 차원. 오스카 와일드,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버나드 쇼, 제임스 조이스. 마담 그레고리가 엮은 환상적인 전설과 민담. J. M. 싱, 숀 오케이시의 참담하면서도 황당한 희비극. 그 모든 문학에 배어 있는 통렬한 아이러니. 더블린은 아이러니다.      


더블린은 거짓말 같은 역사와 진실 같은 허구를 거미줄처럼 얇은 그물망으로 둘러쓰고 있다. 베일처럼 가리고 또 드러내는 역사와 허구의 그물망은 가끔은 잿빛 먼지에 추레하게 뒤덮여 그늘지고 가끔은 이슬을 머금어 햇살에 반짝이듯 빛난다. 런던의 크리스마스 조명 같은 인공의 빛으로 아직은 온전히 물들지 않은 도시. 칙칙하고 추레한 어둠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넓지 않은 도심. 하지만 전 세계의 성장하는 도시들이 다 그러하듯 급속히 잠식되고 있는 도시.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여전히 잉글랜드와 밀고 당기며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부단히 다시 쓰이는, 아마도 이 도시에 다시 오지 않을 역사적 경계선의 한 순간.     

 

석조 건물이 즐비한 도심 한가운데 세워진 하늘을 찌르는 원추형 철탑 스파이어, 그 괴이한 대조가 만들어내는 풍광이 더블린의 랜드마크다. (아이러니와 짓궂은 위트에 도가 튼 아일랜드 인들은 이 구조물을 ‘Erection at the Intersection’이라고 부른다. ‘교차로의 발기’라는 번역으로는 도저히 찰진 어감을 옮길 수 없다.) 스파이어가 우뚝 선 교차로와 이어지는 더블린 최고의 번화가에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파이프를 꼬나 문 제임스 조이스의 유명한 동상이 인파 속에 무심하게 서 있다.      


런던보다 거칠고 런던보다 화통하며 런던보다 섧고 런던보다 뜨겁고, 런던보다 우리와 훨씬, 비할 데 없이 가깝다. 서울처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 중구난방으로 개발되고 있지만 과거의 흔적이 미처 지워지지 않은 골목과 대로를 오래 오래 발로 걸으며 곱씹고, 책을 사랑하는 이 도시 여기저기 흩어진 박물관과 보물 같은 도서관들을 찾고 책을 읽고 작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식민지와 독립투쟁과 민족과 국가의 이야기들을 곱씹고, 템플 바의 술집 한구석에 앉아 싱싱한 굴을 입에 넣고 흑맥주를 마시며, 활짝 열린 표정으로 역동적으로 목청껏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한참, 오래 바라볼수록 좋았다. 낡고 또 새로운 층위를 하나씩 걷어낼 때마다 좋았다. 떠난 후에도 자꾸 되짚어 좋았다. 첫인상을 배반하고 기억과 회상과 읽기로 깊어진다. 언어의 표면과 심층, 상황과 앎의 간극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수사법, 아이러니의 도시답게.            




        

더블린에 내려서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아일랜드 국립극장인 애비 씨어터를 찾아 저녁 공연 표부터 예매했다. 이곳은 아일랜드 드라마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지다. 1904년 W. B. 예이츠와 레이디 오거스타 그레고리는 아일랜드의 국가정체성을 예술적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데 마음을 모았고 “아일랜드의 심층적 정서를 연극 무대로 옮기겠다.”는 기치 하에 이 극장을 설립한다.      


두 거장의 작품을 초연하며 문을 연 애비 씨어터는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1907년에는 온전한 아일랜드 방언을 쓴 J. M. 싱의 문제작 <서구사회의 플레이보이>를 처음 무대에 올린다. 미국 순회공연 중에 필라델피아에서 음란과 외설을 조장한 죄로 배우들이 체포당하는 해프닝까지 겪을 정도로 파격적인 극이었다. 1909년에는 영국 본토에서 공연 금지 조치를 당한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을 올려 표현의 자유를 적극 옹호했다.      


하지만 애비 씨어터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피의 족적을 남긴 것은 1916년 부활절이다. 더블린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봉기에서 핵심 감독과 배우들이 깊숙하게 간여해 영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부분 살해당하거나 체포당해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애비 씨어터에서 부활절에 공연하려 했던 프로그램은 W. B. 예이츠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낭만적으로 미화한 <카틀린 니 툴리한Kathleen Ni Toulihan>이었다. 그리고 이 극에서 주연을 맡은 젊은 배우 숀 코널리Sean Connoly는 최초로 영국군에게 발포했고 또 최초로 영국군에게 피살당했다. 그가 쓰러지자 청년이 흘린 선혈에 민중들이 분노해 시청과 공관을 점거했고 결국 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하지만 무자비한 영국군의 진압에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고 독립을 외치는 대규모 민중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도화선이 된 연극의 작가 예이츠는 훗날 “내가 쓴 이 극이 그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영국군의 총탄에 희생당하게 만든 걸까?” 자문하며 고뇌하기도 했다.      


화끈한 아일랜드 관객들이 애비씨어터에서 난동을 피운 전력도 살펴보면 화려하다. 20세기 아일랜드 드라마의 거장 션 오케이시가 1916년 민중봉기를 다룬 연극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일부 관객들이 독립투쟁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둥, 내용을 트집 잡아 시끌벅적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분노한 예이츠는 직접 무대에 올라 “앞으로도 우리 아일랜드에 꾸준히 나타날 천재들을 이런 식으로 대접할 겁니까?”라고 청중들을 훈계했다. 쇤베르크 교향곡 초연 당시 구스타프 말러가 악담을 퍼부으며 중간에 나가는 관객들과 싸우며 후배를 옹호한 일화가 떠오른다.      


이처럼 무거운 역사의 책임과 영광을 짊어진 애비 씨어터지만 위압적이지도 고답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살짝 실망스러우리만큼 평범한 콘크리트 외관은 1951년의 화재로 원래의 벽돌건물이 완전히 불타면서 재건축된 결과다. 로비도 공연장 내부도 검소하고 기능적이다. 런던은 물론이고 그야말로 눈부시게 화려한 유럽의 여타 국립극장들에 비하면 초라하리만큼 조촐하다. 하지만 내 집처럼 편안하고 무대와 관객의 거리는 한없이 가깝다. 권위주의의 흔적이라고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다. 아무도 드레스코드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동네 영화관처럼 허물없이 드나드는 소박한 길가의 활짝 열린 국립극장은 참으로 아일랜드답다. 애비 씨어터는 지금도 저렴한 공연료를 유지하면서 혁신적이고 연극적으로 아일랜드의 서사를 전 방위로 다룬다는 분명한 기치에 헌신한다.           





내가 찾아간 그 날은 실존인물을 다룬 켄 로치의 영화 <지미의 강당 Jimmy’s Hall>을 아일랜드 음악극으로 각색해 공연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독립 직후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이 천주교와 손을 잡으면서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굳어지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는 깊고 절망적인 권태를 낳는다. 불온한 정치적 성향을 빌미로 추방된 제임스 그랄튼이 미국에서 축음기를 들고 명분만 남고 기쁨이 사라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연극의 막이 오른다. 그랄튼은 1916년 부활절 민중봉기의 영웅인 피어스와 코널리의 이름을 딴 강당을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재즈와 블루스를 도입한다.     

 

그랄튼이 물꼬를 튼 문화적 복수성plurality은 오랜 정체상태를 뒤흔든다. 새로운 음악, 새로운 춤이 굳어버린 권위의 더께를 헤집고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을 허물고 체제의 틈새를 찾아내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자, 마음껏 말하고 마음껏 노래하고 마음껏 몸을 움직이는 자유의 희열이 청년들 사이에 되살아난다. 청년들은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하고, 자유와 희열과 사랑이 주체적이고 비판적 사유의 불씨로 번져간다. 피어스-코널리 홀은 댄스홀이자 커뮤니티센터이자 청년들의 토론장이 된다. 청년들은 연대하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찾는다. 그러자 양극으로 대치하던 IRA와 보수적 천주교인들이 지미 그랄튼을 공동의 적으로 보고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춤추던 소녀는 아버지에게 참혹한 매질을 당하고, 사제는 자비 대신 불관용을 선택하며, 강당은 폐쇄되고 그랄튼은 결국 순교자가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일랜드의 활기찬 춤과 음악으로 흘러넘치는, 땀과 숨결마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일 것 같던 퍼포먼스는, 지미의 강당에서 주민들이 붙잡았던 희망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독립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어야 한다. 유토피아는 역사의 종말이다, 그러니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은 영원히, 꾸준히, 부단히 고쳐 쓰는 이야기라야 한다. 독립국가로 걸음마를 시작한 혼돈의 아일랜드에서 또 다른 억압적 권위로 인해 위험에 처한 혁명의 가치를, 그랄튼은 명료하게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다시 잡아야 해. 자유로운 인간으로 춤을 추고, 삶을 찬미하면서 살기 위해서. 



피어스-코널리 홀의 이름이 기리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들은 물론 예이츠와 그레고리를 비롯한 애비 씨어터의 창립자들도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베토벤의 열정을, 사랑의 급진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그래서 애비 씨어터는 춤추고 노래할 곳을 마련해줬다는 이유로 박해당한 순교자를 오늘도 춤과 노래로 기린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다 같이 일어서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더블린의 밤으로 혼자 걸어 나오는데, 흥분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청년들이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멀리 하와이에서 온 청년들은 포스터 속에서 눈을 반짝이는 지미 그랄튼과 나란히 서서 활짝 웃었다. 춤과 노래에 젖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절정의 삶을 찬미하는 희열의 한 순간이 찰칵, 카메라의 액정화면 속에 영원히 정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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