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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형 Mar 24. 2020

오만과 편견과 나

사랑하는 나의 오만과 편견에 부쳐 

1. 


나는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은 때와 장소를 정확히 기억한다. 무려 삼십 년 전, 영문과 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9월이었다. 필수 독서목록에 오른 수십 편의 영시와 희곡, 소설들을 꾸역꾸역 읽어치우던 때라, 만성 지적 소화불량에 입에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고어와 만연체,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와 장소로 갈라져 취향과 포인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영문학 정전 – 물론 내 짧은 식견이 문제였을 뿐, 당연히 모두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 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낑낑거리며 공부하던 어느 날, 제인 오스틴이 내게 구원처럼 강림했다. 


드문드문한 독해 실력 덕에 오스틴 특유의 유려하고도 가시 돋친 풍자와 사회비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와중에도, 그 책은 마술처럼 찬란하고 눈부시게 읽혔다.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는 일상의 약속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책에 몰입했다. 그리고 미스터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이 대참사로 돌아가고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편지를 읽는 순간, 한창 젊었던 나는 설렘에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 그대로 팔짝 뛰었다. 조용한 도서관에 앉아 있다는 것도 잊고 하마터면 큰소리로 소리칠 뻔했다. “꺄악, 뭐야, 뭐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야?!” 


내 기억 속에서 다아시의 편지는, 인간의 타락을 되돌리는 진리의 빛을 발하는 텍스트인 후고의 루멘 Lumen에 대한 완벽한 표상이다. 정말이다. 그 텍스트는 틀림없이 책장에서 광휘를 발했고 무지의 더께가 앉은 타락한 내 눈에서 – 또한 엘리자베스의 눈에서도 - 잠시나마 어둠을 거두어 주었다. 그리고 돌이켜보건대, 과연 그 순간은 내게 영문학이 먹고사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일생의 덕질로 승화된 한 기점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오만과 편견>에, 정확히는 다아시 씨에 빠져 제때 밥 먹는 일도, 써야 할 논문도 잊고, 한동안 몽유병자처럼 현실을 허우적허우적 헤엄치고 다녔던 때 또한 기억한다. 영국 BBC에서 방송된 <오만과 편견>의 TV 드라마 시리즈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물론 키워드는 ‘다아시 씨의 콜린 퍼스의 젖은 셔츠’였다. 하지만 그때는 비디오테이프의 시대였으며, 심지어 TV 송출 방식은 유럽과 미국/한국이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드라마 한 편을 보자고 PAL 방식의 VHS 플레이어와 TV를 새로 구입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지구 반대편에서 한참 혼자 발을 동동 구르던 오스틴 마니아를 구해준 건, 초창기의 아마존이었다. 두툼한 지갑이나 개미귀신 혓바닥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줄은 알아도 본 적 없기는 마찬가지인 인문대 대학원생 주제에 나는 미국 아마존에서 6개의 비디오테이프로 구성된 박스셋을 정말 큰 맘먹고 호방하게 ‘질렀다.’ 그리고 한 달 가까이 걸리는 배달 기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배송 추적 같은 멋진 서비스는 개념조차 없던 그 시절, 기다림은 막막한 어둠 속 무조건의 믿음이었다.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스마일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큼지막한 해외 배송 소포가 도착한 날, 나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아서 손부터 먼저 씻고 정결한 의례를 행하듯 포장재를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뜯고 벗겼다. 그리고 잠깐만, 정말 잠깐만, 딱 오프닝만 보려고 첫 번째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었는데, 어느새 다음번 테이프를 넣으려고 넓지도 않은 마루를 헉헉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뭔가에 홀린 듯 언젠가부터 다아시 씨를 연기한 콜린 퍼스의 팬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고, 심지어 정신을 차려 보니 뉴욕의 어느 단정한 가정집 거실에서 생전 처음 보는 타국의 오스틴 마니아들과 홍차를 마시고 있더라는, 그런 얘기.       



그러니 내가 <오만과 편견>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부디 궁서체로 읽어달라. 나는 지금 진지하다.               



2.      



이쯤에서 아주 잠깐만 조금 다른 얘기를 하고 넘어갈까 한다. 가상의 서사, 꾸며낸 캐릭터,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애정을 쏟아붓는, 특별한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실용적 가치와 무관하게, 공사를 막론하고 이익이나 윤리와 무관하게, 허구에 매혹당하는 사람들 말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딸아이가 다섯 살 때, 나는 그 애의 그림일기를 보고 실소했다. 누가 봐도 그 애는 일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할머니와 떡을 만들어 먹었다.” “동물원에 갔다.” 쓰더라도 한 문장, 그뿐이었다. 아무 논평도 감상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상상한 캐릭터의 운명에 대해서는 엄청난 열정으로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저기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루비가 보이나요? 루비는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어요. 앗, 그런데 루비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어요! 어떡하죠? 큰일 났어요! 우리 모두 루비를 응원해야 해요!” 그 애는 하루에도 수백 장씩, 읽는 책과 보는 만화,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동물과 세상을 생각했다. 휴지를 연구하는 학자와 한밤중에 연못에서 잉어를 한 마리씩 훔쳐 가는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삽화를 붙였다. 별수 없이 내 딸이라 기가 찼다. 


그 애와 나는 닮았다. 우리는 이빨을 닦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차를 타고 심지어 수업을 들으면서도 뇌의 핵심적인 일부를 소위 ‘실용적’ 가치가 전혀 없는 몽상의 세계에 완강히 할애하는 별종이다. 우리의 중추적 자아는 기억뿐 아니라 게걸스럽게 집어삼킨 허구들이 지탱하고 있다. 내 사춘기를 돌이켜 보면, 선생님과 친구들의 기억만큼, 아니 가끔은 그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꼭지, 꼭지>의 양종하 선수와 <토지>의 서희와 <가을 나그네>의 남영이가 떡 버티고 있다. 그들은 내게 연인이고 우상이고 친구였다. 


텍스트, 디지털 코드, 기호와 상징, 구성된 이미지로 만들어진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세계. 손에 잡히지 않는 사물과 만나 대화할 수 없는 인간들이 사는, 하지만 그 어떤 실체적 물리적 세계보다 더 매혹적인, 결코 손에 잡히지 않으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장소.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니라 기호로, 언어로 지어진 풍경. 우리가 서 있는 이곳도, 우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저곳도 아닌 이런 장소성을 시리 허스트베트는 영어의 ‘욘더yonder’라는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의 풍경에는 판타지의 베일이 겹겹이 드리워진다.      


오로지 그 풍경이 주는 풍요로운 감정, 그 황홀과 쾌락과 고통을 긍정하며 그 세계에서 누리는 내면의 삶을 위해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기꺼이 쏟아붓는, 특별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 나는 이런 인간형을 호모 덕질리쿠스라 부른다. 우리는 늘 같은 영혼을 알아보고 우리만의 작은 연대를 맺는다. 살아오면서 운 좋게도, 내 삶의 크나큰 부분을 차지하는 친구와 가족은 물론이고, 공부나 번역으로 연을 맺은 일면식 없는 작가들과도 이 특별한 연대를 맺을 수 있었다. 더글러스 아담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번역하면서, 패티 스미스의 <M트레인>과 <몰입>을 번역하면서, 시리 허스트베트의 <불타는 세계>와 <내가 사랑했던 것>을 번역하면서, 나는 동류의 영혼을 알아보았고, 팔을 벌리고 손을 뻗어 온몸과 마음을 다해 껴안았다.      

     




3.      



아니, 그게 제인 오스틴이나 <오만과 편견>과 무슨 상관이냐,라고 묻는다면, 세상의 모든 호모 덕질리쿠스들은 살면서 소위 일생일대의 ‘덕질’을 한 판은 하고야 만다, 고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내게는 그 뜨겁게 활활 타올랐던, 오래도록 가슴을 달구었던, 그리고 여전히 불씨가 식지 않은, 평생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열정의 대상이 (지금까지는) 제인 오스틴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고 고백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만과 편견>과 <햄릿>이다. (셰익스피어와 <햄릿>에 관해서는, 언젠가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 두 작품이 말도 못 하게 좋다. 그저 좋고, 읽고 또 읽어도 좋고, 드라마로 봐도 좋고, 영화로 봐도 좋고, 연극을 봐도 좋고, 패러디나 오마주나 스핀오프를 봐도 좋고, 수없이 본 책을 다시 파고 또 파도 좋다. 이 두 작품이 내게 시적 정의를 가르쳐 주고, 공감 능력을 가르쳐 주고, 걸작의 요건을 가르쳐 주고, 정독과 재독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해석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비유와 상징을 가르쳐 주고,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고려해 읽는 법을 가르쳐 주고, 언어의 무한한 폭과 심도를 가르쳐 주었으니, 결국 한 마디로 내게 문학을 가르쳐 준 셈이다.      

그리하여 <오만과 편견>을 새로 번역해 달라는 황송한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정말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지 않았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훌륭한 선배님들이 작업하신 훌륭한 판본들이 나와 있는 지금, 덤벼들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그게 비좁은 내 능력에 얼마나 넓고 깊고 버거운 작업인지 잘 알았기에 고민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작품이라서, 독자들도 그 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그래서 고민했다. 미국의 어느 번역가는 “번역이란 나의 외국인 애인을 집안 식구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세상에, 이 경우에,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추동되는 작업, 소개하는 순간의 그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 압도적인 중재의 책임감을 표현하는 이토록 단순하고도 적절한 비유가 또 있을까.      


고민 끝에 수락하고 나서도 한참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책장에 꽂아놓고, 곁눈으로만 흘끗거리며 날마다 조금씩 ‘덤빌’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러다 어느 날, 드디어 책을 펴고 번역 작업을 시작하려고 이미 외우다시피 하고 있던 첫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을 번역하는 작업이, 적어도 내게는, 단순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한 문장 한 문장 옮기는 공들인 지적 노역에 그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영문학자로서 받은 훈련과 번역가로서 쌓아온 경험과 개인적인 열정의 추억과 그를 통해 축적된 앎이 계속해서 작업에 개입해, 몽글몽글 끝없는 생각의 사슬을 피워 올렸다. 번역 말고도 작가와 이야기와 그 속의 인물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선택으로 점철된 번역의 작업 속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않은 길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설명하고 싶다는 욕구도 솟았다. 그래서 어쩌면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 중에 함께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지면을 빌어 나는 문학과 번역,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독자들이라면 이해할 어떤 특정한 종류의 열정을 말하고 싶다. 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알고 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기 때문에 알게 되었고, 알게 되면서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참된 열정은 주책이고, 감염력이 강하다. 내 열정이 여러분에게 감염되기를, 내 연인을 여러분도 사랑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감히 옮기고 쓴다.   



       

그렇다. 문제의 젖은 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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