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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담 Sep 24. 2017

한국의 SF가 그리운 날의 얼터너티브 음악

내가 SF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오래전에 ‘디 워’라는 영화가 논란이었던 적이 있다. 엔딩에 쓰인 아리랑과 미국에서 만든 한국 SF 영화라는 이유로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한국에서 많은 관객몰이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논란은 ‘100분 토론’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까지 다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패널 중 한 분이었던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도 못하는 걸 한국이 어떻게 합니까?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다리 찢어져요.’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나도 영화가 형편없었다는 것은 동의했지만 이 발언만큼은 한국 사회가 SF라는 장르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SF라는 장르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유치 짬뽕의 내용 없이 때려 부수기만 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같다. 특히 소위 평론가라는 분들일수록 유독 더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많은 것 같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혹은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애초에 시도를 하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콘텐츠 시장은 SF의 불모지이다.

 내가 생각하는 SF라는 장르는 우주가 등장하고, 거대한 로봇이나 외계인이 등장해서 적은 제작비로는 꿈도 못 꾸는 그런 소재에 대한 것이 아니다. SF라는 장르의 본질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 진실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가상의 사회를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구축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SF 장르의 본질을 잘 보여준 시리즈 중 하나가 영국의 ‘블랙 미러’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주로 근미래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심플한 플롯을 취하면서 말하고자 하는바도 명확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시즌1의 ‘1500만의 메리트’, 시즌3의 '추락’, ‘샌주니페로’가 특히 그러하다. 단지 신기한 볼거리를 위해 SF라는 장르를 택하지 않았으며 이야기들이 던지는 질문들도 명확하다. 경쟁 사회, 소셜미디어 사회에 대한 풍자가 주제이거나 과학의 발전으로 고민해야 할 가치의 문제들을 다룬다.

 이 시리즈는 미국이 아닌, 유럽(영국)에서 제작되었으며, 거대 로봇이나 외계인이 나와서 빌딩을 때려 부수는 내용도 아닌 데다가, 그런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 - 한국 시장에서도 충분히 제작 가능할 법한 수준의 -으로 제작되었으니 적어도 뱁새가 황새 따라간다고 꼭 다리가 찢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두 번째 단편영화 'MINUTE'의 한장면

 나는 때로 실화라고 주장하는 콘텐츠일수록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라고 시작하는 경우 대부분 솔직하기 어렵고, 객관적이기도 어렵다. 사람들이 때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거 말이야 내가 아니라 내 친구 이야긴데…’라고 말을 시작한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실화라고 시작하는 영화나 소설들이 사실(Fact)과 실제 사건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진실(Truth)이 존재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가 진실에 관한 것인지의 여부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발견한, 삶을 통관할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인물을 창조해야 하고, 또 이야기의 형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대다수의 SF소설이나 영화가 그렇지 못한 건 사실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현실을 도필 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들 뱀파이어를 만나서 영생을 얻거나, 마법학교에 가거나, 우주인이 되거나… 십 대 시절에나 가질 법한 판타지를 그리는 이야기들이 많고 그런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유행하니 SF가 유치 뽕짝 장르로 무시당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려려니 해야 할 것 도 같다. 그리고 앞서 말한 소위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대다수가 평론가분들이나 문단에서 인정받는 그런 정통 문학이나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야기의 씨앗이어야 할 진실의 종류나 형태에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여러 가지가 있고, 그중에는 분명 SF 세계관과 같은 상상력으로 보여줘야 극명해질 수 있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치 얼터너티브 음악의 등장처럼 말이다.

뫼비우스의 띠에서 영감(?)을 받은 우주의 다리

 어렸을 때에는 인기곡 모음 테이프이나 듣는, 음악에 별다른 취향이 없고, 관심도 없는 녀석이었다가 어느 날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는데, 고등학생 때 친구의 집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너바나‘Smells Like Teen Sprit’를 들었을 때다. 나는 그 기타 리프에 완전히 빠져버렸고, 음악이라는 것에 심취해서는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음악이란 것을 좋아하기 전에 록 음악을 먼저 좋아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얼터너티브 락이라는 장르를 유독 좋아했다.


 록음악을 탐닉하면서 메탈리카나, 레드 제플린 같은 정통적인 록음악 들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음악들은 무언가 비틀스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훌륭한 음악들을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록음악이라는 장르로서 크게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너바나의 음악은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음악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미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 있다. 커트 코베인이라는 영혼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부류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하는 SF와 그 본질이 같다.전혀 다른 장르와 시대의 인물들이지만 커트코베인이 자신의 음악을 다룬 방식, 조지 오웰이나 필립 K 딕이 이야기를 활용한 방식은 본질적으로 닮아있다고 본다. 형식과 관행을 탈피하고, 오로지 진실이 이야기하기 위해 장르를 활용하거나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처음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며 영화에 빠져들게 된 것은 21살 때 테리 길리암 감독의 ‘브라질’과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를 수어 번 보면서이다. 나에게 영화란 처음부터 SF 였고, 그 종착점도 SF라고 생각한다. 디스토피아적인 고전적 SF가 아니라 좀 더 사회 문제에 집중한 그런 SF 세계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싶다. 그래서 20대 때 SF적 요소가 있는 2편의 단편영화를 시도했었다. 처음 만든 것은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연인을 위해서 꿈속에서 살 것인가?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었고, (영화 인셉션이 개봉하기 3년 전에 만들었으니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물론 인셉션은 너무 훌륭한 영화다.) 두 번째로 만든 영화는 넓은 우주에서 사느라 서로 볼 시간이 너무 짧아서 시간을 파는 가게에서 매일 시간을 사는 연인의 이야기였다. (공교롭게 영화 인타임과 설정이 비슷한데 역시 개봉 전 해에 만들었으니 베낀 것은 아니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그당시 나는 내가 원하는 이야기들의 형태를 온전하게 영상으로 전환할 능력이 부족했고, 욕심만 앞섰다. 스토리텔링 능력도 CG 기술도 연출력도 형편없었다. 이제 와서는 그 영상들을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런 멍청한 시도를 시작한 출발점과 원동력이 어떤 명성을 탐하는 심리가 아니라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런 마음속에서부터 발현된 작은 씨앗과 같은 것들이 시발점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매우 자랑스럽다.

 다시 처음의 디워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영화가 형편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를 마치 교수가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듯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건 학교에서나 일어날 일이고, 앞으로 올바른 교육제도가 도입된다면 학교에서도 없어져야 할 일이며 더욱이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을 대상으로 잘잘못을 따지거나 순위를 매기는 행위는 그런 평가나 평론을 하는 사람들의 인기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도록 콘텐츠 시장이 발전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나는 내가 생각하는 SF영화들을 만들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보고 있다. 우주가 들려주는 라디오의 수신율을 높여줄 것 같은 어디가 외계에서 온듯한 얼터너티브 음악들을 들으며 약간의 SF적 요소가 가미된 짧은 소설을 하나 쓰고 있다. 하마터면(?) 웹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야기 중 하나인데 아쉽게도 제작이 되지는 못했다.

 여하튼 이야기라는 것은 꼭 영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글로 써서 혼자서 종결을 지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은 계속 써볼 요량이다. 꼭 무언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조금씩 만들어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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