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임 / 송악산 지킴이, 농부
꿈 많은 아이
나는 송악산이 바라보이는 곳, 알뜨르가 펼쳐져 있는 마을에서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송악산은 소풍 장소였지요. 포장도 안된 길을 터덜터덜 걷는 게 힘들면서도 재미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이들은 뛰어놀기 바쁜 소풍이었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용암이 흐른 흔적, 단층 구조 같은 것들에 더 끌렸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역사를 들을 때면 어렴풋이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중학생쯤에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용머리 해안에 가면 지질구조가 신기해서 지질학자가 되고 싶기도 했고요. 조금 커서는 알뜨르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그 넓고 평화로워 보이는 평야에 상처처럼 박혀있는 고단한 역사. 비행장, 진지 갱도를 건설하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강제당해야 했던 노동들, 그 땀과 희생들이 수없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버려져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이것이 첫 시작입니다. 저 광활한 역사문화 유적지들을 어떻게 하면 잘 간직할 것인가. 학창 시절의 혈기로도 보일 만한 생각이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떨칠 수 없는 책임감으로 다가왔습니다. 학업과 취업 등 5년간의 육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도 오로지 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송악산이 개발된다고?
지역에 내려와 지역을 지키며 살겠다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시를 쓰는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낳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여성농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농산물 수입 반대 운동 등으로 날마다 투쟁이던 시절입니다. 제주도여성농민회연합회장을 지내며 5년의 임기 동안 한중FTA 등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얼마 뒤의 일입니다. 송악산 문제가 불거져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이미 두 번의 투쟁으로 송악산을 개발 바람으로부터 막아낸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환경영향평가에서 부결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통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송악산이 개발된다니 며칠 앓아누웠습니다. 속상해서 밥도 못 먹고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사실 두 번째 송악산 투쟁 때는 농민운동이 한창 치열했을 때라 뜻만 같이 했을 뿐 행동을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막아내기는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지요. 일주일 동안이나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딸이 보다 못해 한소리 했습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고요. 그 말에 훌훌 털고 일어섰습니다. 앞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을 만나 대책위를 꾸렸고, 여성농민회도 함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역의 6개 단체가 시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민들과 함께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한 끝에 서명 운동에 바로 들어갔지요. 쉽지는 않았지만 지역주민 1096명의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송악산은 상모리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고, 이 마을만의 자산이 아니라고 판단됐습니다. 제주도 전체의 자산이고 전도민이 지켜야 할 보물이라는 생각에 제주도 전도민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한 달도 안 되는 동안 1만 2천 명 이상의 서명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지난 1년 반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네요.
다시 송악산에 오르며
예전에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송악산에 날마다 올랐습니다. 새벽 5시면 아이들을 깨워 같이 가는 겁니다. 송악산처럼 아름다운 곳을 알지 못합니다.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은 송악산뿐입니다. 한라산이 바다 건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도 이곳뿐입니다. 한라산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송악산은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가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살 송악산은 지질학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학자들도 인정하는 곳입니다. 이미 2009년에 세계자연유산본부가 여기는 유산이 되어야 한다고 권유한 곳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세계자연유산본부에서 먼저 등재신청을 요청하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근 통계를 낸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 최고의 점수를 받은 관광지도 송악산이라는군요.
이번 싸움은 긴 싸움이 될 거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송악산 문제만이 아니라 알뜨르를 평화공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자연부락을 강제 퇴거시키고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지역민들이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그게 되어야만 지역주민의 삶이 치유되고 지역주민들이 이 땅을 지키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너무 허황된 꿈을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꿈과 희망을 갖고 삽니다.
물려주고 싶은 것
아이 넷을 키우면서 학원에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지역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생각에서입니다. 김밥을 싸서 제주의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도내 기행을 꾸준히 다니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아이가 제주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에 있는 집회에 참석을 하러 간다는 겁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올바른 주장을 하는 시위였습니다. 주저 없이 가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구속될 수도 있어서 엄마가 걱정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속되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니 구속되어도 괜찮다고 말해줬습니다. 이런 엄마가 어디 있냐고, 우리 엄마는 유별나다고 말하지만 아이들도 나를 지지합니다. 아이들에게 인류애를 가르치고 싶었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게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정신적인 힘입니다.
옳은 일이니까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번 와서 잠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삶을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질적인 삶을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농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농촌에 산다는 것, 지역을 잘 지켜내고 터를 닦아서 살만한 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나의 힘입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할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큰 원동력이 됩니다. 투쟁 현장에 갔다 오면 힘이 솟아 농사일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지켜봐 주시라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고 말씀드립니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 여성 농민으로서 지역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구나,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구나, 그렇게 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