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란 / 시인, 농부
감귤 농사의 시작
무슨 노래 가사처럼 우리 집은 가난했습니다. 고아였던 아버지는 서귀포에서 살면서 시발택시를 운전하셨습니다. 며칠 만에 집에 들르는 아버지를 맞아주는 건 너무 가난하고 힘든 집안 풍경이었습니다. 못 먹어서 꼬질꼬질하고 헛배가 볼록 솟아오른 어린 딸아이 머리 위로 파리가 왱왱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나무 이파리를 휘저어서 파리를 쫓아주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이러다가 우리 아이들 굶겨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그만두고 감귤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서귀포에서 본 대로 감귤 농사를 시작한 겁니다. 1970년대 초반이니 감귤나무가 그야말로 대학나무로 막 등극한 시기지요. 삽으로 땅을 파서 나무를 심으며 아버지는 이 나무에 열매가 달리면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수확 철이면 밭 한 구석에 있는 움막에 살면서 열매를 지켰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끝내 손에 남아 있던 상처와 흉터를 보면서 심장이 아팠습니다.
나는 이 노란 것의 이름이 감귤이란 걸 안 어린 나이 때부터 감귤 농사를 도왔습니다. 귤 따는 것은 기본이고, 농약칠 때 줄 잡아당기는 것, 밤 열 두시까지 자동차 시동으로 불빛을 켜서 창고에 저장하는 일 등을 계속했습니다. 엄청난 일인 것 같지만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짓는 사람치고 이런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감귤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여전히 감귤에 기대어 삽니다. 시내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나도 여전히 주말이나 휴가 때면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흙이 좋아
시내에서 중학교를 다닐 적, 졸업 무렵이었습니다. 제주농고에서 학생 유치에 나선 겁니다. 그때까지 제주농고에는 여학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농고를 나오면 100퍼센트 농협에 취직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아이들 중 한 명은 경찰, 한 명은 농협직원, 한 명은 공무원이었거든요. 아버지의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고 싶은 기특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농고에 다니면서 농사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됐습니다. 그때까지는 농사를 공부해서 하는 건지도 몰랐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려웠습니다. 농사도 공부를 해야 하는 거구나 실감하면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결국 원예전문대학에 진학하고 조직배양도 배웠습니다. 졸업 후에는 귀향해서 서귀포 쪽에 있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바나나를 육묘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살아보니 농사 공부를 한 것이 최고로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흙을 만질 때 거부감이 없습니다. 마음이 온화해지곤 합니다.
빛나는 일을 하고 싶어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시골 농장에서 육묘 일을 하는 게 생활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인지 숙소의 작은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저물녘이었습니다. 죽은 나무 사이로 지는 해가 걸려있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문득 나이가 들어서도 빛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나를 값어치 있게 하는 일을 찾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이 뭐가 있을까? 음악, 미술, 글쓰기 같은 거 아닐까? 그렇게 글쓰기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자부심이 특별한 것 없는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즈음에 친구 따라 시내의 찻집에 들렀습니다. 음악다방이었는데 우연히 DJ가 내 글을 읽었습니다. 배경 음악을 깔고 읽어 내려가는 내 글을 들으니 왠지 설렜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작은 문학회에 가입하고 시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시 쓰기는 배운 적도 써본 적도 없으니 잘 쓸 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시를 써가면 이것도 글이냐며 선생님은 알밤을 먹이는 겁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오기가 생기더군요. 내가 너보다 잘 써보리라 다짐했지요. 되건 안 되건, 닥치는 대로 읽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게 정석이더군요. 그러다 보니 점점 글이 나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순간 내 글이 과연 읽을만한 글인가 하는 의심이 들 때면 작은 공모전이라도 보내보고, 하다 못해 장려상이라도 받으면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읽어줄 만한 글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내 이름 석자 앞에 시인이라는 명칭도 얻게 됐습니다. 이제는 빛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한 번씩 들 때가 있지요. 나는 진지하게 살고 있나, 이런 의문이 들 때면 그래도 뭐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50~60퍼센트는 된다고 여기며 삽니다.
시의 위안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는 나에게 종교입니다.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종교처럼 내 가슴에 새기면서 삽니다.
남편과는 사별했지만 결혼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도 셋이나 되고 어떻게든 살아야 했습니다. 집이 3층이었는데 아이들을 끌고 짐을 이고 지고 힘들게 3층 계단을 올라가는데도 이 계단이 끝나지 말았으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그때 당시 김정란이란 시인의 시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이 사랑으로 나는 내 가슴에 박힌 칼날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그래 난 너를 이해한다’. 이렇게 시를 계속 되뇌다 보면 슬며시 남편이 애처롭게 느껴지고 그 시간을 견디게 되더군요. 시가 주는 위안이 아닌가 합니다.
농사도 짓고 시도 짓고
얼마 전에 시집 한 권을 냈습니다. 귤은 12월에 따서 먹으면 그만이지만 귤나무 자체는 1월부터 12월까지 밭에서 계속 뭔가를 해냅니다. 도시 사람들에게 농작물이란 것이 그저 농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에서 열심히 귤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이야기까지 하고 싶었어요. 감귤 수확철이 되면 밭이 온통 주황색입니다. 검은흙에서, 갈색 가지에서, 초록 잎에서 어떻게 저런 색이 나오고 단맛이 나오는지 농사를 전공한 나에게도 신기한 노릇입니다. 그 열매를 키우느라 평생 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밭을 최고, 땅을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밭 가장자리까지 잡풀을 뽑아주면서 밭을 관리하는 우리 어머니와 동네 삼춘들이 시 속에 등장합니다. 이 시집은 내가 농부로서, 시인으로서 반드시 마쳐야 할 과제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눈 뜨면 밭에 가고 어두우면 돌아오고…. 화려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인생을 저렇게 사는 것도 좋다고 말입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