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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ut peach May 26. 2019

주말엔유럽행:블라디보스톡

납작복숭아를 찾아, '곧대리'의 주말 한정 유럽여행기

프롤로그|시작은 #납작복숭아


납작복숭아였다. 

블라디보스톡행 비행기로 나를 밀어 넣은 장본인 말이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구경하는 정사각 SNS 속에는 예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매일같이 런던과 파리를 누비고 있었고, 그들의 보송보송한 하얀 침대 위에는 언제나 #납작복숭아가 있었다. 그들을 보는 축축한 지하철 속 내 얼굴에는 표정 하나 없었지만, 엄지손가락은 복숭아 같은 하트를 연거푸 날려 댔다.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게 만든 장본인 #납작복숭아


납작복숭아란 무엇인가? 어느 순간 유럽 여행의 징표처럼 되어버린 도넛 모양의 그 복숭아. 독특한 풍미의 달콤함이 일품이라던데, 진짜일까? 거실 냉장고 아래 칸에도 엄마가 씻어 둔 *딱복과 *물복이 잔뜩 섞여 있었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오직 납복이었다.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나도 잘살고 있다’라는 징표였다. 맛은 아무렴 상관없었다. (*딱딱한 복숭아와 물렁한 복숭아의 줄임말. 인류는 딱복파와 물복파로 나뉜다고 믿으며 나는 극성 딱복파다.)



유럽은 멀고 휴가는 짧다.

그들을 따라 납작복숭아 원정을 떠나기는 무리다. 그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비행기로 단 세 시간, 북한 바로 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도 납작복숭아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은 최근 TV 여행프로그램을 통해 자주 소개되고 있는 여행지이지만 그다지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는데, 여행책도 방송국도 성공하지 못한 여행 뽐뿌를 납작복숭아가 해냈다. 


내 휴가는 짧지만, 납작복숭아는 가까이에 있었다. 




별★것 없는 혼행


확실한 동기가 생기니 여행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최근 저가 항공사에도 블라디보스톡 노선이 많아져, 급하게 예약했음에도 약 삼십만 원 선에서 비행기 티겟을 살 수 있었다. 비행기로 약 세 시간이면 도착하니 1.5일 정도의 휴가면 충분했고 회사에서도 당당했다. 하루 이틀 정도의 휴가는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어디 놀러 가?’라는 물음도 듣지 않았다. 안 물어봤으니 굳이 납작복숭아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혼행이 좋겠다.
이름도 생소한 블라디보스톡에, 난데없이 복숭아를 먹으러 가자는 제안은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다. 이번에는 동행자 대신 나랑 대화하며 다녀보자. 

 ‘이보쇼, 거 왜 복숭아에 집착하는 거요?’


미리 말해 두겠다. 블라디보스톡은 갈 곳이 별로 없다. 흔히 말하는 관광 명소랄 곳이 거의 없다는 소리다. 최근 관광객이 늘며 날마다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이라고 해서 파리나 런던 같은 별천지 유럽을 상상하면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애초에 관광지가 아니었는데, 저가 항공사 노선이 늘어나며 최근 갑자기 주목받게 된 곳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 점도 좋았다.

나는 여행 시작과 함께 필사적으로 부지런해지는 타입이다. 여행 전 온갖 책과 블로그에서 ‘꼭 가봐야 할 5가지 명소’라든지 ‘안 먹으면 후회하는 4가지 디저트’ 같은 글을 정독 하고, 그 리스트를 구글맵 속 별표로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여행지에서도 눈앞의 경치를 충분히 감상하기보다는, 지금 이곳에서 가까운 다음 명소의 최단 거리를 검색하거나 사진을 건질 만한 포토스팟 찾기에 혈안이 되곤 했다. 구글맵 도장깨기를 하다가 언제나 내 바이오리듬이 먼저 깨졌고, 이따금 여행은 고행에 가까웠다. 헌데 그곳은 별표를 칠 곳이 마땅치 않다고? 오호라, 그럼 별표 없이 어디든 다녀보자.



비행기 모드보다 먼저, 스토리 모드 ON


혼행자는 스토리메이커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1) 인천공항에서 ‘무인 수화물 위탁 기기’를 처음 보았다. 마치 은행원 없이 입금할 수 있는 ATM처럼, 승무원의 도움 없이 캐리어를 스스로 부칠 수 있는 기계다.

여권을 대면 기계의 문이 열리고, 캐리어를 넣으면 문이 닫힌 뒤 자동으로 보관증이 출력되었다. 놀라운 신문물 앞에서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는데, 만약 평소처럼 동행자가 있었다면 ‘대박! 개쩔어!’하고 말았겠지.

 하지만 말 할 사람이 없던 혼행자인 나는 별 수 없이 스토리를 상상한다.  

 ‘저 문으로 들어간 캐리어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면?’ 상상은 부풀어 아침드라마 수준의 파국으로 치달을 때쯤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다. 사람의 일을 기계가 대체한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가에 대해. 그리고 내 일자리는 보장되는가에 대해. 그리곤 쓸데없이 진지해지고 말았다. 


예2)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서인지, 공항 내 면세구역에서 임금 복장을 한 연기자가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동행자가 있었다면 ‘야, 저 사람 뫄뫄씨 닮았다. 헉 존잘’ 같은 얘기를 하겠지만, 역시 혼자이므로 상상해본다. 

‘상감마마, 티파니앤 코오- 납시오오-’ 하는 비장한 외침을.

그리고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맛본 조선 임금의 ‘저녁 수라상은 쿼터 파운더 치즈버거 세트로 들이라'하는 근엄한 어명 사운드를 말이다. 


물론 내적 호들갑으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울 따름이니 혼자 킥킥대고 끝내면 된다. 혼행은 난생처음이라 호들갑을 떨 상대가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스토리를 만들며 다닌다면 꽤 재미있겠다 싶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공항 서점에 들렀다. 여행과 함께 하고 싶은 김하나 작가의 『힘 빼기의 기술』은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지만 한 권 더 샀고, 읽고 싶었던 김민철 작가의 『하루의 취향』도 샀다. 한 손에는 책 두 권이, 한 손에는 필름이 잔뜩 장전되었다.  


짐의 무게가 더해진 만큼 묵직한 믿는 구석이 생긴 것 같았다. 출발하는 순간까지 걱정하는 엄마에게 쿨시크하게 답장을 보내고, 비행기모드로 전환했다. 운 좋게 창가 자리를 얻었고, 필름카메라와 좋아하는 두 작가의 책이 손안에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혼행도 별 것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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