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진보정당 조직실장 오재영
기억해야 할 별들을 위하여 4 -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젊음이란 무엇일까? 중천에서 빛나는 태양이기도 하지만 폭풍처럼 종잡을 수 없는 질주이기도 하겠으며 갈 길 모르는 방랑이기도 하고 거침없는 행진이기도 하겠지. 2020년대에 20대가 될 네 젊음은 어떤 느낌일지 아빠는 사실 이해하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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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빠의 대학 동창 단톡방에 1980년대 풍경을 올리니, 대번에 “북한 같다. 왜 이렇게 촌스럽냐”라는 반응이 나오더구나. 이미 스스로의 젊은 시절마저 낯설게 된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어찌 너희들 청춘의 색깔을 가늠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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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빠가 젊었을 때에도 찬란하게 빛나는 젊음들이 있었고, 그 빛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던 세상을 밝히는 초롱불이 됐다는 거란다. ‘왕년에 뭘 했네’ 하는 소리가 무슨 소용이냐는 타박을 순순히 받으마. ‘그때 그랬으니 인정해줘야 한다는 거냐’는 힐난에도 굳이 항변하지 않겠어. 그저 1980년대와 그 이후의 칠흑 같은 역사를 몸으로 밝힌 사람들의 이름은 타박과 힐난 속에 쉽사리 묻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오늘 소개할 고 오재영(1968~2017)도 그중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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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심리전을 펴던 신라군에 맞서 백제군 병사 세 명이 예술적일 만큼 기기묘묘한 욕바가지로 신라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장면 기억나니? 그들은 ‘보성 벌교’를 부르짖으면서 요새 계단을 올라오지. 오재영은 바로 이 깡다구 넘치는 고장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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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1987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해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우리 현대사의 분수령이라 할 1987년 6월항쟁의 소나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오재영은 이후 이른바 ‘운동권 학생’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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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심야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에 갈 일이 있었어. 역전에서 깡패 같은 놈들 몇몇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두고 몸매가 좋네, 어떻네 요란스레 떠들고 있었다고 해. 여자들이야 말할 수 없이 불쾌했겠지만 그저 발걸음만 재촉했지. 호남선 비둘기호를 기다리던 대학생들도 비슷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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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들, 거 사람들 지나가는데 무섭게 좀 하지 마쇼(친구 조장천 인하대 교수의 회고).” 이건 모아둔 기름에 성냥을 그은 도발과 같았고 엉겁결에 대학생들은 깡패들과 패싸움(이라고 쓰고 ‘두들겨 맞았다’고 읽는다)을 벌이게 된다.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열 시간 내내 오재영은 엄청나게 타박을 받았겠지. “인마, 네가 뭐라고 거기서 그 소리를 해.” 누가 ‘보성 벌교’ 아니랄까 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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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 일화에서 오재영이라는 사람의 일면을 엿본다. ‘군부독재’나 ‘독점재벌’ 같은 거창한 적 앞에서 용감한 사람은 의외로 많아. 그만큼 그 투쟁이 숭고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니 할 말로 시위하다가 전경한테 두들겨 맞은 건 무용담이 될 수 있고 감옥에서도 ‘시국사범’이면 대우가 달랐던 때란 말이지. .
오히려 일상에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당함, 사소해 보이지만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폭력에 대해 시비를 걸 용기는 오히려 더 귀했을 거야. 오재영은 그걸 보아 넘기지 못하는 쪽이었어. 이후로도 오재영은 쉰을 채우지 못한 생 내내 크고 작은 불의에 맞선 투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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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투쟁’을 이력서에 채워넣고 입신양명의 디딤돌로 삼는 일에는 한심할 만큼 서투른 사람이었어. 대학 생활을 마무리한 뒤 그가 택한 건 외무고시도, 번듯한 직장도 아닌 사람들 몇몇이 작당하여 만든 사회운동 단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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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하고 허름한 사무실에 동네 백수 같은 선배들, 쥐뿔도 없으면서 구로 지역에서 뭔가 해보겠다는, 진보 정당 근사하게 만들어보겠다는 의욕만 만땅 채우고 있던 인간들(후배 김수자의 회고)” 중 한 명이 오재영이었지. 그는 수십 년간 한국을 지배해온 군사독재 정권과 보수 야당이라는 정치 구도를 바꾸기 위해 진보 정당을 세우는 일에 투신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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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란 누군가 몸으로 길을 내야 한다는 뜻이지. 천신만고 끝에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했지만 창당을 준비하는 동안 당 활동가들은 한 달에 활동비 20만원으로 버텨야 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어. 월급 20만원짜리 활동가는 “집에 와서도 마치 콜센터처럼 일했고 (···) 사회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에서 분회 모델을 만들어보겠다고 동네 술자리에도 열심히 나가며(부인 권신윤의 회고)” 사람들을 모았다. 무슨 돈으로, 무슨 열정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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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든 정당에서 오재영은 ‘폼 나는’ 자리에 한번도 앉지 않았고 어디 지역자치단체 선거에도 나선 적이 없었어. “나는 뒷선에 있어야 스스로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선배 한석호의 회고)”라고 우겼고, 친구들이 “누군가의 보좌진, 참모, 비서, 조언자로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오재영 너 자신이 리더가 돼라”고 강요에 가까운 권유를 해도 한 귀로 흘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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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친구들이 글 쓰고 논쟁하는 동안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대학생은 진보 정당 운동가가 되어서도 비슷했다. 정파 간에 논쟁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조율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오재영이었고, 판이 깨질 듯하면 막아서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발버둥 친 것도 그일 때가 많았어. 어느 날, 당내 회의에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해 옥신각신하던 일이 있었다고 해. 울산에서 와야 할 사람이 늦어서 회의 장소인 대전에 못 간다고 하자 오재영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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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타고 날아와. 당에서 택시비 내줄게(후배 김준수의 기억).” 그 택시비는 누구 지갑에서 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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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영은 2012년 총선에서 보좌관으로 노회찬을 국회에 입성시키는 데 성공했어. 노회찬은 10개월 만에 국회의원 직을 상실한다. 삼성의 떡값을 받았다고 의혹을 산 검사들의 실명을 밝힌 것이 유죄판결을 받은 거지. 가까스로 일어나다가 무릎이 부서졌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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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던 그는 학원 강사 일을 시작하고 어깨에 무리가 갈 정도로 칠판에 분필질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대로 눌러앉았다면 오재영 역시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명강사로, 또는 학원 재벌로 어깨 펴고 살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쌓여 있던 빚을 청산하자마자 아내에게 묻는다. “나 돌아가도 될까?” 가족이기 전에 진보 정당 운동 동지였던 아내에게 그건 질문이 아닌 통보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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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그는 진보 정당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1년 뒤 홀연히, 그야말로 갑작스레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떴어. “우리는 미래를 당겨쓴 것이다. 몇 년 치 시간과 기력을 다 쏟아부으면서도 우리는 즐겁고 호기로웠다”라는 신장식 변호사(정의당 전 사무총장)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로 길을 내고 가늠조차 불가능한 의지로 “삶을 갈아넣었던” 86 세대 중 한 명이 역사라는 밤하늘의 붙박이별로 남게 된 거야(<시사IN> 제499호 ‘삶을 갈아넣은 한국 진보 정당사’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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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투쟁가요가 어울렸을 오재영이지만 그는 대중가요 ‘낭만에 대하여’를 즐겨 불렀다고 해. 아빠와도 한 번쯤은 술자리에서 만났을 법한 그가 각진 턱을 움직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봤어. 무심코 흥얼거리다가 막바지 가사에서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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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그에게 청춘이란 무엇이었을까.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왜 그는 가슴에 세상의 즐거움을, 누구나 다 내는 욕심을 담지 못했을까. 어떤 마음이 그로 하여금 “와야 할 세상”을 위하여 인생을 걸게 만들었을까.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곱씹어보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