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조된 영국영어가 많이 들린다. 계절에 상관없이 이 곳 알래스카의 느낌은 왠지 딴 세상 같다는 묘한 기분은 다른 금발의 여행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걸까? 기내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장거리 비행으로 잠에 취해 여기까지 날아온 나로서도 기대감에 같이 흥분하고 있다.
겨울에 도착한 알래스카 공항 분위기는 만나는 사람들의 복장만 보고는 도저히 이곳의 날씨를 알 수 없다. 지도상에는 북위 71°17′44″지점이라고 하지만 공항에서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꺼운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도 보이기 때문이다.
흥분의 열기가 감도는 앵커리지 공항의 소란함은 알래스카라는 이름만으로도 막 도착한 여행자들을 들뜨게 한다. 한국에서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이곳도 입국장에서 짐가방을 끌고 밖으로 나오니 북쪽에 사람 사는 동네쯤으로 보인다. 이곳의 공항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일단 놀랬다. 알래스카 주가 미국에서도 동떨어진 곳이라 개인적으로 드넓은 미국의 어느 시골 도시 터미널 규모정도로 생각했는데 예상을 많이 벗어나서 어리둥절하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짐이 운반 되어지는 신속한 일처리를 보니 오늘도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 속도보다 입국자들의 짐이 먼저 터미널 벨트에 도착할 것이 분명하다. 잠시 이 칠흙 같은 밤에 어디까지 날아 왔나 멍하게 있다가 소란스러운 영국 영어에 다시 정신이 든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이 곳의 평균 온도는 영하28도였는데, 지금은 2월인데도, 지구의 이상기온으로 겨울이라기 보다 따듯한 봄날씨처럼 연일 영상기운이 계속되고 있다.
- 이번주에 뉴욕으로 여행간 친구들은 너무 추워서 예약한 시티투어도 모두 취소하고 지금 호텔방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며 전화왔는데, 여기 알래스카는 한 겨울에 영상 3도라니...정말 지구가 이상하네.
앞자리에 탄 이태리 여인들이 나누는 대화에 내가 생각해도 겨울여행지로 도착한 알래스카가 맞나 싶을 정도다. 날씨는 자연의 현상이라 여행자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따듯한 이태리에서 이 친구들은 알래스카까지 스키를 타러 왔는데, 이렇게 영상의 기온 속에 파우더 같은 보드라운 눈이 녹아 버렸으니 어쩌나. 이곳 스키장의 슬로프를 이용하지 못할거라는 현지소식에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은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스키장이 완전 풀북이라는데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혀 있어야 할 알래스카는 지금 스키어들이 슬로프 걱정을 할 정도라니. 밤늦게 도착한 공항의 바깥공기 역시 전혀 추운 겨울 같지가 않으니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된 겨울을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
<투어 1일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이슬에 대지가 촉촉한 앵커리지 공항 근처의 숙소를 뒤로하고 아침부터 달려간 구간은 앵커리지에서 스워드까지 미국에서도 최고의 드라이브코스로 알려진 scenic byway였다. 138마일 (약 2시간)의 거리가 그렇게 멋있다고 한다.
버스가 달리는 진행방향 우측으로 펼쳐지는 설산과 얼음덩어리의 조화에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투어버스가 도로에 진입한지 삼십여분만에 설경만 2백장 이상 찍고 있으니, 정말 알래스카 대자연의 풍경은 계절에 상관없이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곳임에 틀림없다.
- 멀리 저 산 이름은 뭔가요?
- 산이라기보다 '알래스카레인지'에요.
산이 길게 산맥처럼 누워 있는데 어느 봉우리 하나하나에 특정 이름을 부여하기보다통으로 알래스카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알래스카레인지'라 부르고 있단다. 질문이 절로나오게 하는 높은 산들이 너무 많지만 이름이 없다고 하니 여기서는 그냥 알래스카 산맥 중 하나인 보통의 높은 산일 뿐이다.
그런 산에 눈이 내려 하얗게 된 봉우리 풍경과 달리 아무도 손대지 않은 태고적산의 모습 그대로의 풍경은 상상 그 이상이다. 높은 정상에는 매년 쌓이고 쌓인 감히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만년설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형성된 설산은 마치 여인의 속살처럼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카메라 망원렌즈 아니면 헬기투어로 날아서 바라볼 뿐,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여행자의 시선까지 정화해 주는 깨끗하고 순수한 설산의 장관은 멀리 달리는 도로에서도 탄성을 지를만큼 또렷히 보인다.
이런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대자연의 풍경이 이곳알래스카의 매력이라면 그것을 보고 있는 여행자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멋진 풍경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부지런함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투어버스가 코너를 돌 때마다 놀라워하며 찍은 사진들의 감동은 카메라의 프레임을 넘어 오래오래 뇌리 속에 기억될 것이다. 잠시 멍해진 마음을 다독여 카메라 셔트에 더 힘을 실는다
멀리 보이는 설산의 하얀 풍경과 반대로 흐르는 강물은 그저 서해안의 갯벌처럼 검은 회색을 띄고 있다.
- 물은 항상 이런 색인가요?
- 빙하가 녹아내려 흘러가는 물은 이런 색깔이에요. 여름에는 지금보다 연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파란색을 띄지는 않아요
- 이 물이 일년 내내 이런 회색이라면 알래스카 사진에 나오는 강물은 왜 파란색이죠?
- 그 강은 러시안 리버라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이에요.
한여름에도 너무 차가워서 수영은 물론 3분도 손을 담그지 못한다는 빙하옥수는 교통혼잡 하나 없는 도로와 나란히 흐르며 도로를 질주하는 여행자들을 즐겁게 한다. 하늘까지 청명하여 눈과 마음까지 시원해진 최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알래스카 투어버스는 신나게 질주한다.
장거리 드라이브를 마치고 시내로 들어서니 통제된 거리와 함께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다니고 있다. 오늘이 바로 앵커리지에 놈까지 약 10일간 이어지는 개썰매 대회가 있는 첫 날이다. 이번 대회에는 전세계 71팀이 참가한다고 하는데 그 스타트를 오전 10시에 한다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겨울이라 동네가 조용할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세계적인 대회를 취재하려는 수많은 방송국과 엄청난 장비를 장착한 사진작가들의 모습에 일단 기겁을 한다. 도로에 줄 지어 기다리는 경주용 썰매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도시의 거리는 인파로 넘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단체로 왔는지, 아니면 전 세계에서 개썰매 대회를 직접 관람하려고 날아온 건지, 도로는 대회장 주변으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앵커리지의 일요일 아침 열기가 뜨겁기만 하다.
개썰매 대회는 10일간 계속 되는데 (중간에 비박하면서 끝까지 달리는 대회) 중간에 달리다가 다치거나 죽는 개들도 많다고 한다. 멋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썰매개(알래스카허스키)들은 자기의 앞 날이 어찌될지도 모르고 카메라 셔트와 사람들의 환호에 답하듯 요란하게 짖어대고 있다. 개들이 짖을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늠름한 자태에 환호를 보낸다. 도로 여기저기에 방송팀과 카메라 그리고 선수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들로 수시로 길이 막히고 방송국 카메라 장비 때문에 도로가 어수선하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대회 현장을 즐기고 있다.
영상 기운이라 쌓인 눈이 녹으면서 이 곳은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억지로 도로에 눈을 많이 뿌려둔 상태다. 개썰매 대회라서 개들이 눈 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인공 눈으로 눈길을 만들어 두어야 제 시간에 대회를 스타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의 발에 끼워진 앙증맞은 신발들은 대회의 규정인지 모든 참가 개들이 신고 있다. 그렇게 2분간격으로 한팀 한 팀 알래스카허스키들이 출발하는것을 보니 이 도시의 숙박비가 왜 비싼지 이해가 되었다. 경주 대회 규정상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어느 길로 달리든 상관없지만 (전부 눈밭이라 길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해진 체크포인트는 꼭 찍고 달려야 한다는 룰만 있다. 24시간 달리는 경주이지만 어느 팀이 어디에서 잠을 자든 몇 시간을 달리던 밤새 달리던 신경쓰지 않는다. 결과는 결승점에서 결과로 말할 뿐이다.
<투어 2일차>
이번에 다시 알래스카를 찾은 이유는 빙하열차 때문이다. 날씨와 상관없이 1년 내내 운행한다는 알래스카 기차는 아침 0815분에 단 1회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full day) 관광열차이다. 노란색 띠를 두른 기차는 깨끗한 모습으로 플랫폼에 서있다. 오전에 도로를 따라 달리던 풍경과 달리 해가 떠오르면서 기온 차로 인해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낮에 보던 하얀 설산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기차 좌석에 앉아서 설산을 보니 기분이 또 다르다. 달리는 버스에서 보던 풍경과 달리 기차는 천정까지 유리인데 기대한 만년설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건 자욱한 안개 뿐이다. 와인을 마시며 안개 속을 응시한 채멍하니 시간을 보낸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순간 멀리 살짝살짝 산 정상의 흰 봉우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확 펼쳐진 엄청난 산맥들. 맑고 푸른 하늘에 강물과 설산을 동시에 보다니. 하늘에는 중간 중간 흰구름이 띠를 두르고 있어 대지에 뿌린 안개와 정상의 만년설 그리고 기차에서 바라보는 유리창 너머의 대자연까지. 어느 한 순간 버릴 게 없는 절경 그 자체다.
지금 3월초인데 아침에는 영상 3도, 오후에는 기온이 내려가더라도 영하 7도다. 체감상 어제 오늘 날씨 정도면 두꺼운 겨울 외투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겨울은 겨울이라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내밀어 셔트를 누르면 손은 금방 차가워진다.
자욱한 우주 속을 달려가는 은하철도 999처럼 알래스카 빙하열차를 타고 가는 기분은 와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곳의 대지에서 피어오른 안개 속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기차의 큰 유리창에 바싹 붙어서 촬영을 하다가 반팔티를 입고 걸어오는 여인과 마주쳤다.
-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지금 반팔을 입고 계시네요
-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정도 날씨면 아주 따뜻한 거에요. 사실 저기 강물도 꽁꽁 얼어야 하는데 저렇게 얼음덩어리가 녹아 떠다니고 있으니 지금은 절대 추운 날씨가 아니에요.
- 그럼 겨울에 꽁꽁 언 강은 언제부터 녹기 시작하나요.
-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월은 되어야 저런 얼음덩어리가 강에 보이는데 올해는 날씨가 많이 이상해요.
헬기투어로 보는 알래스카 빙하 조각
빙하…안개…설산…얼음덩어리….메마른 대지…
보이는 모든 풍경에서 계절의 경계가 없다. 기차에서 밖을 보는 알래스카 빙하여행은 인간이 하루하루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는지 일상의 시간과 대자연이 만든 시간에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잠시 내가 외계의 다른 시간에 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전혀 추운 게 아니라는 그녀의 위로에 나도 장갑을벗는다. 한 손에는 와인 잔을들고 다른 손에 카메라를 들고 셔트를 눌러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손이 시릴 정도로 공기가 차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화이트 와인이 얼음물처럼 차갑게 몸 속으로 들어오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 신기하네. 분명히 온도는 영상인데 체감날씨는 영하라니. 우리나라 겨울보다 더 추운 거 같은데 정말 여기 날씨가 장난이 아닌걸. 금방 손이 얼어버릴 정도로 알래스카의 바람은 매섭다. 그런데 이 날씨를 따듯하다고 말하면 이상기온이 아닌 진정한 겨울은 얼마나 추운걸까?
검은색을 띄는 진흙 같은 물은 바다물이 흘러든 소금물이라 짜서 얼면 안되는데, 이곳의 겨울은 소금물도 얼게 한다고 하니 알래스카 겨울여행은 제대로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알래스카의 여행 성수기는 여름이다. 대자연의 색상은 흰 색에서 초록으로 바뀌다가 다시 푸른색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한 계절만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겨울이 남긴 하얀색에서 봄의 초록색을 지나 여름의 푸른색으로 빠르게 바뀐 대자연의 색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여행이란 기대를 하게 되고 여행자는 언제나 풍경에 욕심을 내게 된다. 계절이 바뀌면 이런 강물이 여름에 더 푸르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실제 만년설이 녹아서 처음 강으로 흘러들면 완전히 갯벌처럼 검은 색이 되어 흐른다.
멀리 높은 산에는 항상 흰 눈이 쌓여 있지만 나무가 전혀 자라지 않는 수목한계선 위로는 만년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이라고 설산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아래로 푸른 나무들이 싹을 틔우고 대지에 봄이 오면 다양한 색상의 야생화들이 피어나 산이 보이고 강이 있는 들판은 천지가 꽃 밭이 된다. 보통 알래스카 사진하면 한 장의 사진에 얼음덩어리(빙하조각)와 꽃과 푸른 강물 그리고 초록의 침엽수림이 수채화처럼 담긴 풍경을 볼 수 있는 게 그런 이유다. 나처럼 여름에 다시 찾는 알래스카 여행자들은 4계절을 한 프레임에 담고 싶어 반드시 재방문을 하게 된다.
기온은 영상이지만 봄은 아니고 겨울이지만 따듯하다고 말하는 이 곳의 계절은 여행자의 상식을 무시한다. 오늘 달리는 알래스카 빙하열차는 어쩌면 여름의 햇살 속으로 겨울의 공기가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겨울여행은 계절의 혼돈을 맞이하는 알래스카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 채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북극의 하늘에 카메라 셔트만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