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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캐런 Dec 07. 2022

[여행자의 수첩] 붓다, 그 흔적을 찾아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내다 [인도&네팔 불교 성지 순례기]

(인도를 사랑하는 여행자로 떠나고 싶은 마음에 당시 첫 발을 내디딘 여행기를 꺼내며...)






방황의 끝, 희망의 시작



여행이라는 타이틀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길을 떠나고 가방을 꾸린다는 것은 즐거운 비명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이렇게 직업으로부터의 일상을 벗어나 원하는 곳으로의 여행 가방을 꾸리는 마음은 소풍가기 전날의 동심처럼 날아갈 듯한 행복감이 일어난다.


특히 이번 여행은 보통의 여행, travel, 이 아닌 오랫동안 고대하던 여정이라 더욱 그러하다. 홍콩에서 일기 시작한 싸스의 공포가 여행시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이 때다 싶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벼르던 네팔 경유 인도행 티켓을 예약하였다.


여권에 해외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찍기 시작하면서 부터 마음에 품은 내 꿈의 여행지는 바로 'INDIA'였다. 굳이 종교적으로 불교신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왠지 끌리는 땅 그러면서 강렬하게 나를 유혹하는 듯한 느낌의 땅이 바로 인디아였다.


어쩌면 나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환상을 머금은 인디아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뭏든 난 그곳을 가고 싶었고 반드시 가야만 할 것 같은 운명과도 같은 심정으로 여행가방을 꾸리고 말았다.


가장 즐겁기만 했어도 부족할 청춘의 20대를 밀려드는 허탈감과 삶의 공허함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가 보다. '왜', '어떻게'라는 끝없는 자문자답속에 풀어지지 않는 숙제들로 스스로를 힘들게 몰아가고 있었다. 그 때 품은 내 삶의 일탈의 비상구가 바로 인도로 가는 것이었다.




2003년 봄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들의 집합장, 종교의 천국 인도!

내 생의 마지막 휴식처고 싶은 땅 인도!


많은 이유를 달지 않아도 나의 인도는 불교의 성지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가보고 싶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 인도를 가기는 정말로 쉽지 않았고 쉽게 가도록 상황이 풀려 나가지도 않았다.


내일보다 오늘 하루가 더 급하게 돌아가던 일상에서 인도로의 티켓발권은 참으로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시간이 있을땐 돈이 없더니 돈이 모이니 시간이 없어 힘들게 되니...아마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어리석은 중생의 어쩔수 없는 모습이었나 보다.



1. 탄생-룸비니


아침 잠이 많은 나로서도 이 곳 사람들의 부지런한 하루를 도저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전 8시면 벌써 샤워에 밀린 세탁까지 모두 끝내고 게스트 하우스를 나서야 한다. 시멘트를 뜨겁게 달구는 그 강한 햇살의 열기에 잠을 더 청해봐야 더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다. 유적지 대부분의 개장과 폐장 시간도 일출과 일몰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일상의 시간을 그저 시침과 분침에 움직여 살아가던 나에겐 다소 생소한 시작이다.


태양이 이 광활한 대지를 달구기 전에 나그네 걸음은 부지런히 부산을 떨어주어야 하루 일과가 피곤하지 않다. 이곳에서의 10시대 태양이 한국의 정오 이후의 시간대 태양보다 더 강하니 거의 체감온도는 40도를 오르내린다. 일사 직전의 위험 수위마저 여러번 느끼면서 나의 뜨거운 여행은 시작되었다.


밤새 달려온 버스 너머로 펼쳐진 룸비니 평원의 풍요함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계 4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창시자 고오타마 싣타르타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은 그저 동산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불교 왕국으로 자림 매김한 거대한 성역이었다.


강한 햇빛에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다니는 그들에 비해 나는 길만 나서면 눈부신 햇살에 썬글라스부터 챙기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 땅에선 어쩔수 없는 이방인인 셈이다.


룸비니 동산 입구를 들어서서 직선으로 뻗은 대로를 바라본다. 과연 이 길을 이 날씨에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릭샤를 타고 갈 것인가 고민하는 것 조차 우습다.


그래도 명색이 성지 순례이거늘 첫걸음부터 너무 쉽게 시작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일 뿐! 이 태양빛 아래에선 삼십분도 채 걷기가 힘들다. 순례 자체가 고행의 길이라고도 하나 일단 오늘 아침엔 자신이 없다.


아침부터 바지런을 떠는 미소년 릭샤꾼의 미소에 10루피로 흥정하고 룸비니 동산으로 들어간다.


열달이 지나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로 가던 마야부인이 도중에 룸비니 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끌리어 잠시 쉬어가고자 한다. 가마에서 내린 왕비가 꽃이 활짝 핀 가지를 잡자 곧 산기를 느끼며 그 꽃가지를 잡고 선 채 오른쪽 옆구리로 옥동자를 낳았다고 하는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사방으로 걸은 다음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는데...


엄청난 크기의 그 보리수 나무 주변엔 부적 형태의 많은 종이들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오색의 천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정말 중요한 내부는 공사중이라며 아직 개방을 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충 살펴 봐도 그 중심건물인 PEACE STUPA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방향으론 세계 각국에서 나온 엄청난 규모의 사찰들이 각자의 특색있는 형식을 띄고 들어 서 있다.


아주 잘 꾸며진 계획된 종교 왕국처럼 느껴진다. 질서정연한 각양각색의 건물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나라마다 다른 건축양식을 그래도 느낄 수 있다.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 이름아래 이렇게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저기 많은사찰들에서 계속해서 증축 및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이미 이곳을 오기 전에 카트만두와 포카라 지역을 미리 둘러보고 온 나로선 이곳에서의 색다른 분위기와 깔끔함에 그저 감탄사만 연발한다.


한국의 사찰 '대성석가사'에서도 40도가 넘는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불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집 떠난지 2주만에 드디어 첫 성지에 도착한 것이다. 잠시 개인적 감상을 접고 2층으로 올라가 대웅전에 108배를 올린다.




2. 열반 - 쿠쉬나가르


불교 8대 성지 중 룸비니를 제외한 다른 7곳은 모두 인도 대륙에 있다. 아침부터 서둘러 숙소를 나온 덕에 국경도시 수나울리에 일찍 도착하였다.


네팔 출국 도장을 찍고 두어 발자국 걸어가니 국경이고 다시 몇 발자국 걸어가니 인도 입국 도장을 찍게 되어 있다. 너무도 간단한 출입국 절차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이 도장을 받기 위해 나는 얼마나 벼르고 벼르며 수년을 기다려 왔던가! 아~ 이렇게 쉽게 지나오고 말것을!


탄생지를 시작으로 다음 코스는 일단 열반지 쿠쉬나가르로 잡았다. 먼저 인도돈으로 환전을 하고 몇발자국 걸어가니 내가 어디로 가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먼저 알고 손짓을 한다.


낯선 여행자이거늘 너무나 뻔한 여행자들의 이동 경로에 그들은 이미 선수가 되어 있었다. 약간은 망설이는 척 해야 하는데 그냥 어설픈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 따라 나서 고락푸르행 버스를 탄다.


국경도시 수나울리에서 교통 거점도시 고락푸르까지 91km거리를 두시간 이상을 비포장 도로로 달리다 보니 먼지란 먼지는 다 뒤집어 쓰게 된다. 다시 53km 거리인 쿠쉬나가르까지 더 심한 조건의 찌그러진 버스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태운 상태에서 두시간 이상을 더 달려간다.


지치고 지친 몸뚱아리는 이 더위에 8km라는 짧은 거리조차 걸어갈 자신이 안선다. 10루피를 외치는 릭샤꾼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풀썩 배낭을 집어 던지고 걸터 앉는다.


5분이나 갔을까? 한국사찰 '대한사'에 도착하고 나니 반가운 한국어로 인디언 보살이 인사를 건넨다.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방으로 들어가 가방부터 풀고 벌렁 드러 눕고 말았다.


이렇게 멀고도 험할수가! 아 정말 진짜 고행의 순례가 시작되려나 보다. 앞으로 있을 인도에서의 여정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네팔은 네팔일 뿐! 인도는 얼마나 더 요란스럽고 시끌벅적한지 혼이 다 나갈정도다. 이 지저분함의 극치 앞에서 성지 순례의 긴 대장정에 슬슬 걱정이 앞선다.


태양빛이 수그러드는 4시 이후를 기다렸다가 사찰을 나선다.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다비장인 람바르 스투파(Rambhar stupa)는 도우미를 허락 해 주신 인디언 스님과 동행하였다. 니르바나 템플(Nirvana Temple)의 열반당과 주변 지역은 먹거리도 찾을겸해서 혼자 이리저리 다녀 보기도 하였다.


1956년에 인도정부가 지어 공개한 길이 6.1m의 열반상은 붉은 색을 띤 한개의 사암을 깍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잠시 좌선을 하고 일어나려고 했더니 지킴이 할아버지가 열반상을 덮고 있는 천을 들추어 내며 그 속을 보여 주시는게 아닌가! 얼마나 놀랍던지 물론 알고보니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는 대신 약간의 팁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열반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풀어보면 니르바나(Nirvana)에서 나온 음역으로 '불어서 끈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한다. 즉 번뇌의 불꽃을 불어서 끈다는 적멸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해탈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열반당 뒤편의 열반탑은 개방이 안되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거닐며 부처님의 흔적을 찾아본다. 반야심경과 자비경, 금강경을 조용히 읽어내려간다. 그러나 이내 예불 시간이 되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찰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 6시가 되어 시작한 힌디어식 염불을 들으며 다시 108를 올린다. 땀으로 샤워한 듯 젖어도 마음이 이렇게 한량없이 가볍고 즐거울 수가 없다.


욕망의 세계에 대해 애착을 끊은 사람들은 죽음을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데 과연 내 자신은 그동안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였는지? 지나친 집착과 애욕에 더 힘든 삶을 엮어 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새삼 지나간 나 자신의 세월을 되돌아 보게 된다.



3. 기원정사 - 쉬라바스티


울퉁불퉁 신작로를 고속도로 달리듯 마구 속력을 내는 기사들의 터프한 드라이브에 버스로 이동하는 일이 점점 힘들게 느껴진다. 기차는 더 복잡하고 지루하기 이를데가 없지만 쉬라바스티로 가는 길은 교통 편의상 기차를 이용하였다.


익히 인도 기차 여행의 악명을 들었던지라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한국 사찰 '천축선원'에 도착하기까지의 길은 또 얼마나 멀고도 험하던지 외로운 순례자의 길에 서러운 눈물이 다 나온다.


그래서일까? 어렵게 도착한 만큼 이 곳에서의 시간은 따뜻함 그 자체다. 날씨는 이미 한 낮의 체감 온도가 43도 전후를 오르내렸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무엇보다 여행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한식다운 한식을 맛있게 먹어 보았다.


소박한 미소를 지니신 주지스님의 존재에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상상을 불허하는 더위에 대부분의 스님들은 이런 더운 계절엔 인도를 떠나 한국이나 다른 시원한 수행지로 몇 달 가 있는다고 한다.


붉은 벽돌 담벼락만 덩그러니 여기저기 남겨진 기원정사의 유적터를 무심히 바라본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과연 어느 곳이 사헤트고 마헤트인지 말만 듣고는 그 경계를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붓다께서 무상정각을 증득한 후 21번째가 되는 해로부터 마지막 해를 제외한 대부분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 바로 이 기원정사인데...세월속에 묻혀버린 붓다의 흔적을 찾아 기웃기웃 돌담만 밟으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많은 자료없이 다니는 순례자의 초행길에서 과연 어디가 사원터였고 신전터였는지 구별하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입구 좌측에선 발굴 및 복원 작업으로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벽돌을 다듬는 인부들로 기원정사가 분주하다.


왠지 그저 잘 꾸며진 깨끗한 공원같은 느낌의 기원정사에서 나름대로 붓다의 향기를 찾아 거닐어 본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웅장하게 들어오는 나무가 있다. 지금 나무는 서 있는 위치나 종자면에서 오리지날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아난존자가 보드가야의 보리수에서 묘목을 취하여 심었다는 전설의 그 아난다 보리수라고 여기고 삼배를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9시경에 사찰을 나설 때 두어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보고도 남을 거라는 스님의 뜻을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래도 탄생지 룸비니, 열반지 쿠쉬나가르와는 사뭇 다른 쉬라바스티의 기운에 왠지 자꾸 끌린다.


서둘러 돌아가지 못하고 괜히 논두렁을 가로질러 저 너머 보이는 작은 마을까지 가 보기로 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이상한 옷차림을 한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동네에 무슨 곡예단이라도 등장한 분위기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10명은 된다. 서로 대화가 안 되니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만 한다. 말을 걸어 보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아마도 어떤 목소리인지 말은 과연 통할 것인지 궁금해 하는 듯하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드러나는 그 천진난만함에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인다. 천천히 메들리로 노래가락을 뽑았다. 한 서너곡 불렀나 보다. 아이들이 더 모여 들었다. 박수치기조차 쑥스러워하는 그들 앞에서 혼자서 북치고 장구 때리며 놀았다.


그저 반응이라곤 생글생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노래 부르며 쇼 하는 나보다 그들이 오히려 더 미안해 하는 표정이다. 더 이상 뽑아낼 노래조차 없다.


그냥 운동삼아 평소 잘하는 법안명상(기공체조의 일종) 동작을 시범보여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이 익숙해진 아이들 몇명이 일어나


쑥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따라 한다. 귀여운 녀석들!. 마지막 동작까지 따라한 한 명의 소년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다. 특별히 가지고 다니는게 없었으니 그냥 목에 걸린 볼펜을 건넸다.


갑작스런 선물에 당황해하는 아이의 얼굴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


길을 재촉해 일요일이라 개방이 안 된다는 태국사원을 뒷문으로 들어가는 행운이 생겼다. 태국의 젊은 여승이 7년동안에 이루낸 그 결과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찰 내 곳곳에서 페인트칠이며 건물을 청소하는 작업들을 계속 하고 있다. 흰색 보자기를 둘러쓰고 일하는 대부분이 여승들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뭉쳐지는 그 응집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4. 2차 결집지 - 바이샬리


그동안 많은 인도 시골의 마을들을 스쳐 지나갔다. 버스 이동 중 잠깐 쉬어가기도 하고 날이 어두우면 머물다 가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 곳 비하르주의 바이샬리 만큼 열악한 농촌 환경의 시골을 아직 본적은 없다.


왜소한 체구의 비하르 주민들이 들판이나 길거리에 적당히 자리를 잡아 짚으로 엮은 엉성한 움막에서 대가족이 맨발로 살고 있다. 그 생활 환경의 열악함에 이 모습이 과연 인도의 진짜인가 싶어 할 말이 없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똑같은 24시간을 살면서 어쩜 이리도 완벽하게 다른지 인생의 배분 법칙에 분노가 인다.


붓다 이전의 시대에 이미 북인도 일대는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고 한다. 바지안 연합이 형성되었던 기원전 6세기까지만 해도 비하르주는 인류 최초의 공화국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만큼 번창했던 지역이었단다. 그 중심지로서 이 곳 바이샬리 또한 손꼽힐 만큼 화려한 도시였다는데, 지금은 인도 25개 주 중에서 최악의 빈곤주가 되었으니 권력과 부귀영화의 유한성에 무상한 세월만 탓해본다.


붓다가 열반지 쿠쉬나가르로 떠나기전에 마지막 하안거를 보낸 곳이고, 자인교의 창시자 마하비라가 태어나 유년기 12년을 보냈던 자인교의 성지이기도 한 바이샬리.


불교 8대 성지 중 유일하게 호수까지 끼고 있어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데 지금 내 눈에 보여진 모습은 그저 참담함 그 자체이다.


열악한 동네이다 보니 나그네가 쉬어갈 곳도 마땅찮다. 게스트 하우스라고 소개 받은 곳에선 도저히 하루밤도 머물고 싶지 않을 만큼 열악한 상태다. 이미 늦어 버린 시간 앞에서 슬슬 걱정이 앞선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게 지어진 투어리스트급 호텔을 들어선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간 노숙을 해야할 상황이니 어두워지기전에 숙소부터 정해야 한다. 하루밤 정도 비싸게 잘 운도 아니였는지 입구가 잠겨있다.


다시 되돌아가서 시내에서 잠을 잔다는 건 더 자신이 없다. 체력이 이미 오늘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고 복잡하게 타고 왔는데 또 다시?


부처님 당시엔 교통 수단도 아예 없었을 텐데 이 많은 성지들을 도보로 다니시며 진리를 설하였음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연해진다.


한숨만 쉬며 주저 앉은 나를 지나가던 한 할아버지가 자기집으로 가자고 청한다. 이미 월드컵 코리아로 유명해진 코리안에 대해 따뜻한 친절이었다.


이번 여행 중 처음 민가에서 자 보는 기회인지라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내 돈내고 자던 숙소들도 불편하고 지저분하기 그지 없었는데 과연 이런 시골 민가에선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앞선다.


처음엔 일단 거절을 할 수 밖에 없다. 나의 불안을 아는지 한국사람 몇명이 자고 갔노라며 안심을 시킨다. 무엇보다 월드컵 코리아를 연발하며 무척이나 이방인을 반가이 대하고 있다. 딱히 그 시간에 갈 곳도 없고 하니 일단 그렇게 따라 나선다.


으~악 이런 잔인한 밤이 또 있을까? 밤새 모기와의 전쟁으로 한숨도 못잔 것이다. 손님 왔다고 내 놓은 모기장은 이미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났으니 과연 그 밤이 어떠했으리라 상상에 맡긴다.


모기도 평소와는 다른 객의 맛을 아는지 그 구멍난 모기장에서 할머니와 나란히 잤는데도 나만 지독하게 물렸으니 아~ 한해 동안 물릴 양을 하룻밤에 다 물린 듯하다.


그래도 밤의 악몽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여정은 또 다시 새로운 태양과 함께 즐겁게 시작된다. 이 곳은 다른 유적지와 달리 볼거리가 의외로 많은 지역이었다. 1박만 하고 떠나기엔 너무 아쉬운 지역이 아닐 수 없다.


마우리아 시대의 돌기둥 Lion Pillar와 호수 옆 박물관 그리고 기생 암바팔리(Ambapali)가 붓다께 감화되어 붓다와 일행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후 기증한 망고 과수원까지 여기저기 많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5. 최초 사원 죽림정사 - 라즈기르


모기와의 전쟁으로 이미 온몸이 두드러기 마냥 벌집이 된 상태에서 다음 성지 라즈기르로 길을 재촉하였다. 8대 성지를 찾아 가는 길중에서 가장 힘들고 버스 이동이 많았던 난 코스가 바로 바이샬리에서 라즈기르 가는 길이 아니었나 싶다.


같은 비하르 주 내에서의 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열악한 환경의 주다 보니 차량이나 교통 편의가 초행의 순례자에겐 너무나 힘이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인심까지 얼마나 박하던지 다들 물건이나 팔고 돈이나 뜯어 내려는 듯 달려들기만 하니 두려움 마저 안고 가방끈을 조여 메고 다녔다.


아침 일찍 바이샬리에서 출발해 라즈기르에 도착하니 한밤중이 되었다. 하루 종일 버스만 갈아타고 다녔으니 이동 내내 이건 지옥과 지옥의 경계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수록 만족도는 커진다? 빈곤의 늪을 헤매는 옹색한 바이샬리와는 달리 라즈기르는 이미 엄청난 상권이 형성된 번화한 도시였다. 여기저기 게스트 하우스 간판도 엄청나게 많고 외국인을 위한 영어 표시판 및 환전소에 은행까지 갖춘 대단한 관광 도시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불교 성지라서 이기 보다는 자인교의 성지로 더 큰 발전을 하고 있는 도시였다. 인도에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중산층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자인교의 본부가 가 이 곳에 있었다.


아무리 종교의 천국 인도라지만 어쩜 이렇게 확연히 틀릴 수가 있는지. 한국에선 이름 정도만 들었을뿐 관심조차 없던 자인교가 라즈기르를 이만큼 발전시킨 주춧돌이라고 하니 종교와 문화 그리고 인간과의 연관성에 대해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미얀마 절에서 향내 맡으며 108배를 올렸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어졌다. 밀린 세탁도 할 겸해서 2박을 조용히 보냈다. 자인교 본부에서도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기에 아침엔 가방을 자인교 숙소로 옮겨 놓았다.


입을 하얀색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모습부터 무척 인상적이다. 살생금지의 실천이라고 한다. 혹시 대화를 하다가도 입으로 들어오게 될 벌레조차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참으로 다양한 종교의 모습이다.


첸나이에서 올라와 자원 봉사로 도우미를 하고 있는 인심좋은 아저씨로 부터 자인교의 성지 여기저기를 소개 받았다.


생각보다 너무 깔끔하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안구 수술을 무료로 해주는 작은 안과 병원도 있다. 창시자 마하비라의 생애를 보여주는 박물관도 잘 꾸며져 있다.


이 곳도 역시 인도의 한 부분이거늘 기존에 보아왔던 인도의 모습들과 사뭇 다르다.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시설들과 규모에 종교의 천국 인도를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원봉사로 일을 하며 봉사 그 자체를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인교 덕분에 라즈기르가 이렇게 승승장구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교성지로 알려진 빔비사라왕이 기증했다는 죽림정사(Venuban Vihar)와 영취산(Gijjhakuta) 그리고 칠엽굴(Saptaparni Cave)과 빔비사라의 감옥 외엔 크게 불교 성지로서의 유적지들이 제대로 복원이나 추가 발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보면 문화재 관리국으로부터 무관심스럽게 내팽켜져진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붓다의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온 나로선 이 대륙에 존재하는 힌두교적 애정에 화가 난다. 인간은 개인적 동물이라 자기 종교에 대한 애정만 남게 되는 것일까 어쩜 이렇게 무심하게 내버려질수 있는건지...


예전에 터키 성지를 여행할 때 성지 대부분이 폐허화 되어 있는 모습에 기독교 신자들의 이슬람적 터키 정부에 대해 노여움을 토해내던 모습이 떠 오른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불교 성지 순례라는 거창한 목적으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나로선 대부분 성지의 초토화에 그저 기가 막힌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해줘도 부족할 판에 몇 몇 뜻있는 종교 단체에서 그 역할을 담당해야만 하니 가야할 너무 아득하지 않은가.

6. 해탈 - 보드가야


라즈기르를 벗어난 이후 부터의 이동은 수월하다. 라즈기르 자체가 큰 도시라 벗어나는 교통편도 잘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다음 성지인 보드가야의 명성은 세계가 다 아는 곳이 아니던가. 별도로 가이드 북을 참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먼저 알고 길 안내를 자청할 정도다.


일단 가야까지 버스를 타고 서 오토릭샤로 보드가야까지 들어간다. 벌써 도시를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상당히 발전된 도시임을 산뜻한 거리가 말해준다. 그렇다 이제는 한달 정도 지나니 주변 건물 또는 도로 상태만 보아도 어느정도 규모의 마을인지 감이 온다.


그런면에서 보드가야에서의 2박 3일은 유명세 만큼이나 불편하고 비싼 교통비를 내면서 다녀야 하는 관광도시 그 자체였다. 한국사찰 '고려사'의 스님 역시 공석이었고 배낭책에 소개되면서 벌써 한달 이상 또는 며칠씩 사찰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론 집 떠난지 한달만에 가장 많은 한국인을 한 자리에서 만난 셈이다. 이미 혼자만의 여행에 익숙해진터라 특별히 수다스럽게 한국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짐을 풀고 간단히 샤워만 하고 붓다가 좌정하여 해탈한 마하보디 보리수(Bodhi Tree)를 찾아 108배부터 올렸다. 야외에서 108배를 하긴 이 곳이 처음이다. 땀으로 몸이 범벅이 되어도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은 한량없이 시원하다.


외부다 보니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지 동양여성의 절하는 모습에 대한 호기심 있는 시선인지 아니면 그들도 순례자의 이름으로 모여든 고행을 함께하는 중생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은 붓다께서 '위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신 자리위에 세워진 52m 높이의 피라밋 형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사원이다. 물론 처음부터 불교계의 사원으로 관리가 되어 왔던 것은 아니고 한 때는 짐승을 잡아 희생의식을 치르는 힌두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뜻있는 불교계의 인사들에 의해 지금은 관리위원회까지 구성되어 원할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일까?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 느끼는 내 눈에도 8대 성지 중 가장 위엄있고 뿌듯함마저 드는 성지로 기억된다. 힌두교가 강세인 인디아에서 그나마 가장 괄목할 만한 불교적 성과가 여기 보드가야에 있었다고나 할까.



7. 초전법륜 - 샤르나트


바라나시에서 12 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오히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의 명성에 밀려버린 지역이기도 한 샤르나트. 여행가이드 북에도 아주 작은 지면만을 할애해도 되는 작은 도시 그러나 불교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를 나선다.


그래도 바라나시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샤르나트 거리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치고 있었다. 자연히 시골 성지들과는 거리의 구성원 색깔부터 다르다.


에어콘 빵빵한 대형 차량에서 화려한 색상에 유러피언 스타일 그대로 멋있게 치장한 사람들이 향수 냄새 풍기며 다니고 있다. 간만에 진한 향수 냄새에 어지럼증까지 올 정도다.


40도가 넘는 온도에서 열심히 카메라로 관광 그 자체를 담아내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인디언 가이드의 설명만 공허하게 울리고 다들 엄청난 무더위에 짜증섞인 표정들이다.


혹자는 바라나시의 떠들썩함을 피해 샤르나트에서 며칠씩 쉬어가도 좋다고 충고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도시의 명성은 무상정각을 증득한 후 처음으로 설법한 녹야원과 초전법륜상이 있는 박물관 때문이다.


바라나시에 머물지 않고 무갈 사라이역에서 내려 오토릭샤를 타고 바로 달려온 나로서는 이 도시의 고요함에 그동안의 피로가 다 녹아드는 느낌이다. 한국 사찰 '녹야원'의 위치가 마을 입구에서 깊이 들어간 안쪽에 위치해 있어 다소 찾는데 시간은 걸렸다.


순례의 길은 멀고 험할 수록 만족도가 커지는 것일까? 이 곳 녹야원에서도 예외없이 그러하다. 바라나시에서 종교 관련 유학중인 어느 부부의 우애가 그러했고 본인도 여행 중이라 바쁠텐데 주지 스님의 빈자리를 메꾸며 독서 삼매에 빠져 지내는 어느 여대생의 여유가 그러했다.


이 포근함에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수일을 머무르고 싶을 만큼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찌던 고행의 행진을 잠시 접고 푹 쉬고 싶어졌다.


2층 대웅전에서 108배 부터 올렸다. 아마도 내가 기간을 정하지 않고 다니는 여행자 였다면 이 곳에서 일주일 이상을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나에겐 성지가 한 군데 더 남았으니 나는 또 다시 배낭을 꾸리지 않을 수가 없다.


8. 초자연적 경험 - 상카샤


드디어 이번 순례의 마지막 여정지다. 마음은 벌써부터 흥분이 일어난다. 불교 8대 성지 중의 한 곳임에는 분명한데도 많은 불교성지순례 상품에서 빠지게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굳이 이 곳까지 안 가도 불교성지 순례자로서의 역할은 충분할 거라는 유혹도 있었다. 그래도 하나를 남겨놓는다는 건 나답지 못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왜 빼도 되는 성지였는지? 왜 굳이 갈 필요 없는 곳이었는지 도착하고 보니 바로 이해가 된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듯한 쓸쓸한 분위기가 여기저기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좌측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으나 인적하나 없다. 우측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에선 몇몇 스님이 일을 하고 있다.


이럴수가! 이건 정말 너무 심하다 싶다. 이렇게 썰렁할 수가!


일단 스리랑카 사원으로 들어간다. 이 무더위에도 주지 스님은 사찰을 지키고 계셨다. 주지스님의 편안한 인상에 그 동안의 순례가 정리되면서 마지막이라는 성취감에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겹쳐진다.


먼저 샤워를 하고 성지 순례의 마지막 108배를 올렸다. 드디어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온 몸에서 감동과 기쁨에 땀이 흘러 내린다. 처음으로 긴 낮잠으로 지친 육신을 달랬다.


섬 나라인 스리랑카에선 육류는 안 먹어도 어류는 먹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공양 때 올라오는 반찬이 물고기도 있고 새우도 있다. 워낙 인도 음식을 즐기는 나지만 이렇게 맛있는 사찰음식을 먹게 되다니 이 또한 순례의 또 다른 선물이 아닐런지.


해가 뉘엿해진 뒤에서야 사찰을 나선다. 직선도로로 계속 30여분을 마을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좌측에 철책으로 둘러싸인 아쇼카 석주가 보인다. 다시 몇발자국 걸어 들어가니 신통력 제일의 목련존자가 붓다가 다시 이 세상에 내려 올 장소가 상카샤일 줄 알고 준비했다는 하강지가 보인다.


붉은 벽돌을 이용하여 이루어진 작은 탑과 불상이 모셔진 신전터가 있다. 그러나 이게 왠일인가 지역 주민들이 몇 명 올라오더니 힌두교적 사원으로 이용하는게 아닌가? 이미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었음이 여기저기 흔적으로 알수가 있겠다. 그저 안타까움만 밀려온다.


법현과 현장의 두 순례승이 이곳에 들럴때만 해도 허물어지는 했어도 돌과 벽돌들로 만들어진 3개의 계단들을 보았다고 했는데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 성지 상카샤는 그렇게 소리없이 잠들고 있었다.



아쉬움 그리고 또 다른 시작


늦게 시작한 불교와의 인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공부하진 못했다.그래도 힘들 때 마다 나의 발길은 어김없이 절로 가게 되더라니 드디어 이곳 인도에서 8대 성지를 마감한 것이다.


인도 대륙을 여행하면서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건지 그리고 어디까지 인간의 영역을 지배하는지 끊임없이 고뇌하게 하더니 이제야 그 출발점에 제대로 선 기분이다.


죽음이 삶의 마지막임을 알고도 우리는 현재를 부여잡고 아웅바둥 매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커다란 대륙 인도에서의 순례는 내 삶의 참 모습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인으로 살면서 얼마나 사치스러운 고민을 했으며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에 집착해 왔는지 알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로 성지를 찾아 떠나고


이슬람인들을 사우디 메카로 성지를 해야만 할 계율이 있는데

과연 종교의 천국 인도에서의 불교의 위치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물론 종교학적으로 더 많은 성지와 유적지들이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성지 순례라는 이름으로 길을 떠나는 해당 종교인들에겐 그 어떤 곳도 안타까움 그 자체일까?


세계지도를 펼쳐 들고 세계일주를 꿈꾸며 여행을 일로 다니는 나로서도 이번 불교 성지 순례는 오랫동안 준비한 꿈의 선택지였다.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스스로 준비한 셈이다.


어느 민족과 특정 문화에도 구속되지 않는 진정한 지구촌의 한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많은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산다.


꽃 몽우리 피는 봄날에 시작한 작은 여행 가방에 가을같은 풍성한 결과를 담아 오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 이제는 또 다른 성지로의 티켓을 준비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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