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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식이 Jul 06. 2017

뿌리 깊은 나무

서른넷 그리고 서른하나, 부부 디자이너 아치울 스튜디오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점심이 한참 지난 후에도 하늘은 쾌청했다.


나지막한 산 아래 조용히 자리한 아치울 마을로 가는 길. 출퇴근 시간이 아닌 시간에 서울의 외곽 도로를 달리는 일은 어쩐지 훌쩍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압구정에서 자동차로 20분, 서울특별시에서 경기도 구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작은 동네. 구리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사진작가는 이 길을 수백 번도 더 다녔지만 이런 마을이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할 만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그저 눈에 띄는 것이라곤 ‘태극기 동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산, 산으로 통하는 도로 초입에 국밥집, 그리고 ‘할머니 손맛’ 한정식집. 중년의 등산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트레킹 코스겠거니 했지만 그 속엔 호화주택과 새로 지은 빌라, 오피스텔이 섞인 작은 마을이 있다. 물론, 등이 굽은 한옥과 자투리 땅에 심어놓은 파, 마늘, 그리고 양봉장도 있다. 마을 유지가 손수 길러 수확한 벌꿀은 마을 가운데에 있는 노인정에서 살 수 있다.

양봉장을 기준으로 북쪽의 산자락엔 고급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고, 남쪽에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빌라 하나가 서있다. 모두 합해 다섯 채, 그중 세 채에 신혼부부가 산다는 소박한 건물이다. 아치울 스튜디오는 이 빌라의 꼭대기층에 자리하고 있다. 꼭대기 층이라고 해봐야 1층의 주차장 공간을 합해 겨우 4층 높이일 뿐이다. 하지만 전망은 강남의 초고층 빌딩에 못지않다.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시야의 끝이 어디를 향해있든 초록이다.


아치울 스튜디오의 공동 대표이자 디자이너 원주희는 부부가 함께 사는 신혼집이자 아치울 스튜디오의 작업공간을 ‘아치울 루프탑’이라 부른다. 그녀에게 일하는 시간과 일 하지 않는 시간에 경계가 없듯, 일 하는 장소와 쉬는 장소에 구분이 필요 할리 없다.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일이 녹아든 삶. 상상하는 것만큼 멋지고, 생각보다 훨씬 더 부지런해야 한다. 

신용규와 원주희. 내가 평소에 그들을 부르는 방식대로 하자면 신 실장과 주희는 같은 일터에서 만나 2년 전 부부가 되었다. 결혼 직후 주희가 먼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몇 개월 뒤 신 실장도 회사를 나와 아내와 함께 독립적인 행보를 위한 발판을 닦았다. 그리고 꼭 1년 전인 6월 30일, 아치울 스튜디오가 세워졌다. 부부끼리 작게 시작한 만큼, 첫 사무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혼집이 되었다. 이름도 결혼 후 그들이 터를 잡은 마을의 이름을 따랐다. aachiul.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나는 어쩐지 이 글자가 archi-ul로 보인다. 별다른 뜻은 없고 그저 건축을 뜻하는 영단어 architecture가 떠오르는 것인데, 단순히 알파벳을 공유해서라기 보다는 건축에 관심과 열의가 깊은 부부의 취향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 다니던 회사, 잘 나가던 사회적 지위를 뒤로하고, 고정적 수입도 기한 없이 미뤄두고 독립을 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시각 디자인 분야에서는 명성이 높은 회사였고, 딱히 직군을 바꾸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굳이’ 위험을 무릅쓴 이유가 무어냐고. 주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모든 상황들을 알았다면 그렇게 한 번에 그만두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농을 섞은 목소리지만 솔직한 대답이다. 몰랐으니까 용감했다는 것. 세상의 모든 기성세대가 당신의 청춘을 돌아보며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숙함과 턱 끝까지 채워진 자신감. 청춘에게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제임스 딘도, 비틀스도, 배철수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치울 스튜디오도.

아치울 스튜디오는 디자인 에이전시이다. 디자이너의 능력이 필요한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최대치를 최고 효율로, 그리고 ‘보기 좋게’ 만드는 일을 한다. 여기서 ‘보기 좋다’는 것에는 (특히 한국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무언가를 보기 좋게 만든다는 것이 -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가상의 무엇이든 -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그냥 이렇게 적기로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속담을 나를 이렇게 해석한다. 떡은 음식이니까 다 제쳐두고 일단 ‘맛’이 좋아야 보기에 좋았던 첫인상도 계속 남아있는 거라고. 디자인에서 많은 경우에, 혹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해석이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은 그저 포장을 잘 하는 일이라는 뿌리 깊은 오해가 만연한 한국에서 젊은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는 아치울 스튜디오도 ‘맛’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디자인의 본질에 집중하고, 나름의 기준을 지키는 것 말이다. 


“요즘 디자인에 민감한 사람들과 신생 카페들 사이에서 아르네 야콥슨의 ‘세븐 체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하나에 70~80만 원을 호가하는 무시무시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고 있는데, 솔직한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열광하는 이유에 공감을 못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엄청 편하더라.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 의자가 몇십 년 동안 스테디셀러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의자가 가진 본질에 집중한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본질에 집중하고, 본질을 해치는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디자인이 롱런할 수 있는 디자인, 롱 라이프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치울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디자인을 할 때는 항상 눈길을 끄는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본질을 추구하는 디자인에 기준을 두려고 한다”

몇 년 전, 한남동에 디자인 편집숍 ‘디앤디파트먼트(d&department Seoul by mmmg)’가 오픈했을 때 주희는 대구에서 서울 구경을 온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가주었다. 디앤디가 뭔지, 롱 라이프 디자인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감흥 없이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따져보며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졸업반이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오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녀가 많이 변한 만큼이나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쓴 문장이지만 이해되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딱 맞는 말이다. 그녀의 외모, 생활, 취향 등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녀는 또 그대로이다. 8년 전 런던에서 처음 만났을 때나, 6년 전 디앤디에서 눈을 빛내던 때나, 지금이나.

“직업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디자이너라고 대답하면 패션 디자이너, 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인지 되묻는다. 지금도 부모님은 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가 하는 일을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항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는지 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어떤 디자인을 하고자 하는지와, 디자이너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디자인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디자인 프로세스나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에서 자꾸만 비롯되는 오해에 안타까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여행책이든, 스마트폰 앱의 UX 디자인이든, 대기업의 사보이든, 아치울 스튜디오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고, 디자인한다. 정통적인 북 디자인부터 인터넷 사보와 UX 디자인, 브랜딩 등 아치울 스튜디오가 다루는 디자인 범위는 꽤 넓은 편인데, 아치울 스튜디오의 디자인을 어떤 물리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것으로는 디자인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매체를 다루려고 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회사에 다닐 때는 정통적인 방식의 그래픽 디자인과 북 디자인에 치중하는 편이었는데, 독립 후에는 ‘책’이라는 한 가지 매체에 묶여있는 것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디자인 프로젝트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고. 많은 시도와 경험을 통해 신 실장과 주희는 아치울 스튜디오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아치울 스튜디오의 디자인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쁜 것을 만드는 것이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물리적 한계를 넘어 디자인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매체를 만지고 있지만, 아치울 스튜디오의 근간은 책을 만드는 일이다. 북 디자인, 혹은 편집 디자인이라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디자이너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하는지는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주어진 내용을 받아서 표지만, 혹은 내지까지 디자인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 기획단계부터 같이 참여해서 마지막 인쇄와 배포까지, 책이 만들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경우도 있다. 아치울 스튜디오는 최근 서울시 의료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서울시내 15개 시립 병원이 시민들에게 보다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을 서비스 디자인이라는 디자인의 한 분야로 풀어나가는 프로젝트의 기록물로써의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직접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니지만, 책이라는 매체에 담긴 콘텐츠가 조금 더 흥미로울 수 있도록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조언하고, 함께 기획하며 작년 한 해동안 진행된  프로젝트를 엮어서 올해 초 첫 번째 볼륨을 출판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면서 서비스 디자인과 서울시 의료서비스에 대하여, 비전문가라면 어렵다고 느낄 만한 내용들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기록하고 전달할 계획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아치울 스튜디오는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매체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비글램’도 그중 하나이다. 아치울 스튜디오의 새로운 행보를 볼 수 있는 비글램은 스파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다. 신 실장과 주희는 외부 에이전시 역할을 너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써 비글램 팀과 함께 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비스 기획자가 다소 모호하게 그린 그림을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흔히 ‘B.I.’라고 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물론이고, 시장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상품을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사용자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지를 팀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매체의 변화에도 적용될 수 있는 디자인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려는 아치울 스튜디오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치울 스튜디오가 하는 일을 요리사와 비교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요리사에게 준비된 재료와 정해진 레시피를 모두 가져다주고 김치찌개를 끓여보라고 하면, 요리사는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김치는 얼마나 익었는지, 이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등 아무런 정보도 없이 요구받은 대로 김치찌개를 끓인다. 하지만 조리업계에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가는 요리사들은 원재료가 어디서 어떻게 길러졌는지를 꼼꼼히 따질 뿐만 아니라 직접 농장을 운영해서 재료를 공급하기도 하고, 그날의 날씨나 재료의 상태 등에 따라 매일 매 순간에 가장 잘 맞는 메뉴를 내어놓는다. 그렇게 만든 요리를 먹으면 감각적으로도 감동을 받게 되지만, 신선한 재료로 영양 균형에 맞춘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니 건강에도 좋다. 이렇게 두 명의 요리사 중에 우리가 바라보는 디자이너의 역할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후자이다.”

인터뷰의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은 무엇이고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여 성실히 답변을 해준 그들에게 새삼스럽지만 디자이너로서 꼭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념이 있느냐 물었다. 디자이너 신용규는 매 순간, 누구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답했다. 성실 근면. 아치울 스튜디오에게 있어서 무엇이든 대충한다는 건 없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이해하고, 전문가로서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곳이 어디이든 공백이 생기면 그 사이를 메워주는 일. 그리고 연결된 공간을 함께 걸어가며 여정을 만드는 사람. 아치울 스튜디오가 필드 자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 만남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쏟아졌다. 


2017년 7월 6일 목요일.


글_황은솔

사진_이현재

협조_플레이버 www.flavr.co.kr


아치울 스튜디오_

신용규 @yonggyushin

원주희 @jooh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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