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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늘 Apr 17. 2020

디어,인도

10화. 핑크빛 도시, 자이푸르

아침밥으로 청포도를 한알씩 입에 넣으면서 숙소를 나섰다. 숙소 근처 작은 슈퍼마켓에서는 짜릿하게 시원한 얼음물을 팔았는데.(종종 다른 슈퍼마켓에서는 미지근한 물을 팔기도 했다) 하루의 시작은 그곳에서 꼭 물을 사먹게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아주 시원한 물을 아침에 마실 수 있는 것. 


자이푸르는 핑크시티로 불린다. 색감이 지닌 묘한 힘에 이끌려 가고 싶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 다른 한 곳은 블루시티로 불리는 조드푸르다. 무튼 이 도시가 핑크빛으로 칠해진 사연은 100여 년 전, 영국 왕세자가 도시를 방문했을 당시, 정치적 묘책으로 환영의 색깔을 상징하는 핑크색을 온 동네에 칠했다는 것이다. 이 색깔 덕분에 자이푸르는 인도를 대표하는 관광 도시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다른 색으로 건물을 칠하는 건 금지되었다고 한다. 


서로 빵빵대기만 하는 도로에 서서 툭툭을 잡아타고 구도심에 들어선 순간, 바랜 핑크빛이 눈 앞에 가득 펼쳐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도에서 이렇게 정갈하게 정돈된 도시 풍경을 보다니, 생소했다. 무질서의 인도답지 않은 구획 도시, 핑크로 온통 칠해진 이질적인 공간에 첫발을 들인 감흥은 놀라웠다. 


첫 번째로는 자이푸르 왕가의 궁전, 시티 팰리스 궁전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낮은 지붕선에 단정한 건물들이 가득했고 인도에서는 이런 고요와 아름다움이 주는 평안을 맛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땀으로 등을 적시는 더위 속에서도 넓은 궁전을 돌아다니는 일이 지치지 않았다. 더 구석구석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보시오
시티 팰리스


다음으로는 '바람의 궁전'이라는 뜻을 지닌 하와마할을 보기 위해 그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를 향했다. 이곳 옥상에서 하와마할 건물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유독 창문이 많아 바람이 잘 통하는 궁전은 왕실 여인들이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고 한다. 

하와마할


자이푸르는 보석 등의 액세서리가 유명한 동네라 반지 가게에 들려 구경했다. 구경만 하려다가 문스톤이라는 반지와, 초록색 반지를 샀다. 맞는 사이즈를 고르기 위해 계속 반지를 꼈다 뺐다. 주인아저씨는 더 비싸고 더 많은 반지를 보여주고자 안달이었다. 나 또한 왼손에 반지 두 개를 끼고 있었지만, 색깔이 영롱한 반지들에 눈을 뺏기고 있었다. 딱 두 개만 사야지 다짐하고 고르고 골랐다.


반짝반짝


숙소로 돌아와 하루 일정에 마침표를 찍으면 쌓아둔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건 혼자 여행을 한다는 긴장감 속에 모르는 이와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누는 피로감.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써야 하는 부담감. 더위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체력적인 지침이 다 몰려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루의 여정, 어떤 것을 보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나하고만 대화한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답답하게 느껴져 오기도 한다. 기쁨도 슬픔도 혼자 나눠야 하니까. 그래서 여행 중 만난 친구가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유난히 반가웠다.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6인실 도미토리를 쓰고 있었고 그중 건너편 침대칸을 쓰고 있던 룸메는 샤워를 먼저 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그럼!' 그녀는 나보고 나가서 저녁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물건을 강매하려는 잡상인 말고 누군가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눠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저 몇 마디 나누는데, 답답했던 속이 뚫렸다. 조드푸르가 홈타운이라는 그녀는, 아주 익숙하게 자이푸르 골목길에 날 데리고 다녔다. 그녀와 다니면서 처음으로, 비정상적인 사람들만 가득했던 인도에서 젠틀하고 부드러운 사람하고 같이 다닌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한살이 많았던 그녀는 자이푸르에서 가장 맛있는, 인도에서도 손꼽히는 라씨집인 왈라라씨로 데리고 가서 음료를 사주었다. 든든한 가이드가 생긴 기분이었다. 음료값, 택시값을 다 자기가 낸다길래 미안한 맘에 저녁을 샀다. (물론, 계속 사주겠다고 했지만) “디스 이즈 마이 찬스!!!”라고 우기며 밥을 살 기회를 얻었다. 

 


서울 어느 카페와 견주어도 될 만큼 보기 드물게 세련된 식당이었다. 인도에 이런 식당이 있다니, 편견에 사로잡힌 말이지만. 창이 크게 나있어서 햇빛이 잘 들었고 시원한 에어컨, 음식 맛도 좋았다. 피자, 파스타, 커피, 디저트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팔았고 분위기도 조용하니 좋았다. 특히, 속이 안 좋아서 매일 물이나 과일만 먹다가 약발이 들었는지, 어제부터 몸이 돌아왔다. 음식이 들어갔고 피자가 정말 맛있었다. 내가 혼자 빙긋빙긋 웃으니 물어본다.


친구 : 왜 웃어?

나 : 아임 해피. 딜리셔스


그녀도 웃는다. 여행 중에서는 보편적인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위주로, 한국에서는 내 것도 아닌데, 정해진 척 말했던 나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주로 얘기를 나눴다. 나도 모르겠는 나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어서, 그들 앞에서 잘 정해진 척 말했던 거 같다. 오늘 일만 얘기하는 지금이 좋다. 


친구 : 오늘은 어디에 다녀왔어?

나 : 나는 시티 팰리스랑 하와마할, 몽키 템플 다녀왔어. 길 가다가 코끼리도 봤고. 

친구 :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마켓을 가봐. 저렴한데 살 게 많아. 가족은 다 서울에 있어?

나 : 아니, 다 흩어져있어. 나는 서울에 있고 큰언니는 중국에, 작은 언니는 제주도에. 너는?

친구 : 남동생은 델리에서 공부하고 있고 난 자이푸르에 살고 부모님은 조드푸르에 계셔. 

나 : 공부하러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해? 인도에서도 공부를 많이 시키는 편이야?

친구 :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편이지. 대학을 가야 직업을 얻고 성공하니까.

나 : 한국만 할까..저기 사람들 봐. 빨간불에 길을 건너, 또 초록불에도 길을 건너. 도대체 신호등이 왜 있는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등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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