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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찰하는 보통여자 May 21. 2024

여행은 익숙함을 더 애정 하게 한다

여행은 익숙함을 더 애정 하게 한다.



모처럼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장소에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여행 그 자체에 대한 큰 감흥은 없다. 대놓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여행의 거창함도 좋지만 그보다는 내 일상 범주 안에서 자잘한 새로움을 맞닥뜨릴 때의 감정이 더 신선하다. 허나 여행을 마다할 사람이 있으랴. 떠나기 전 있는 듯 없는듯한 은근한 설렘이 일상 곳곳에 알게 모르게 베여있는 이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남편은 이번 여행이 조용한 힐링 느낌이길 바랐다. 산과 바다 중 택하라면 나는 무조건 바다 파지만 어쩐지 이번은 숲이 주는 특유의 고요함도 색다를 것만 같았다. 



도착한 곳에서는 다량의 피톤치드가 콧속을 찔러 들어오는 듯한, 순전히 기분 탓인 산뜻함을 느꼈다. 오로지 푸르른 것들로 둘러싸여 외부 세계와 바람직하게 단절된 것만 같다.기존에는 주변에 관광지가 많거나 숙소 내부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곳을 선호했다만, 여행을 가서까지 굳이 편의를 사수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여행의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따라서 평소의 내 선호와는 다르게 이번 여행에서 편의성을 크게 고려하진 않았다만, 막상 이곳도 우수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이 선택은 모순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숲이 주는 다소 고립된 느낌에 편의를 어느 정도 배제했다는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뭐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도착해서는 가장 먼저 수영을 했다. 저만치 멀리 보이는 나무들이 서로 알아서 조화를 이루며 야외 수영장 뷰를 한 폭의 그림처럼 만들어주었다. 나는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씻고, 뭣 하는 이런 자잘한 과정들이 귀찮아 물놀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과거 젊은 시절 수영에 흠뻑 빠져 중독되다시피 수영을 열렬히 배울 때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취향은 세월을 타는 모양이다. 물놀이를 워낙 좋아하여 애기와 놀 생각에 한껏 들떠있는 남편을 보며 나는 마지못해서라도 차분히 물놀이에 합류해 본다. 부모님을 모시고 온 이들, 애기와 함께하는 사람들, 한창 좋아 보이는 연인들, 주변에는 저마다 각자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객실로 돌아가 수영으로 노곤해진 몸을 잠시 뉘인다. 전에는 호캉스의 매력을 몰랐지만 나이 든 지금 숙소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그 행복을 이제는 절실히 알 것 같기도 하다. 저녁은 배달음식으로 나름 진수성찬을 꾸려 즐겨본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여행도 즐길 수 없음을 실감하듯, 평소보다 빠르게 찾아온 피곤함에 남은 시간을 덜 즐긴 채 아쉽게 잠에 빠져 버렸다. 



상쾌하지는 않은 아침이었다. 잠자리가 바뀐 애기도 적응이 필요했던걸까. 애기는 간밤에 쉴 새 없이 보챘고 자연스레 나 또한 설잠을 잤다. 허리는 또 왜 이리 뻐근한건지, 이곳 매트리스는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게 익숙지 않은 부분을 마주하면 모든 게 내게 적합하게 맞춰진 집이 살짝 그리워진다. 퇴실을 하고 숙소 주변에 잘 꾸려진 길을 거닐었다. 생각지 못하게 눈앞에 펼쳐진 적막하고도 평화로운 장면은 이번 여행의 주된 희망사항을 충족해주는듯 했다. 숙소는 그렇게 작별을 고한 후 주변 관광지를 들렀고 이곳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여유 있게 움직였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고개가 꺾일 듯 졸아가며 그새 축적된 피곤함은 여실히 드러났다. 여행은 사실 고생 그 자체다. 분명 눈앞에 으레 행복해야 마땅한 순간들이 가득하지만 매 순간이 즐거움만으로는 가득하진 못하다. 고된 활동으로 체력적으로는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짤막한 순간들 속에서 평소의 일상처럼 권태로움을 불현듯 느끼기도 한다. 나는 여행하는 그 순간 자체보다도 떠나기 전의 은근한 설렘과 여행이 내게 남기는 여운을 더 좋아한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집이 최고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절로 나오지 않던가. 부재가 있을 때 비로소 등한시된 일상은 마구 뽐내듯 진가를 발휘한다. 기껏 하루 떠나있을 뿐인데 집이 주는 포근함은 배로 다가오며 동네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비스무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여행을 빌미로 잠시 눈 돌렸던 내 반복되는 일상을 다시금 훑고 되짚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익숙한 일상 속에 다시 들어가 참여하는 것이 유난히도 반가울 따름이다. 



내 활동 범위 속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만, 그곳에 잠시 있어보지 않음으로써 그 자리가 은근하게 그리워지는 것. 늘 비슷하게 눈에 담아오던 낯익은 광경들이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그 익숙함에 마음을 주고 그 안전함 속에서 자잘한 만족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이날의 여행이 가물 해질 때면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의 탈출을 앞둔 기대감을 즐기고, 여행의 시간 속에서 새로움에 양껏 노출되며 은근한 고생을 하기도 하고, 다녀와서는 여운으로 한동안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일상을 탈피해 봄으로써 기존의 보편적 날들에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을 느끼고 그 익숙함을 더 애정 하게 되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 여행이 내게 주는 묘미는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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