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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 크는 나무 Sep 06. 2024

[시와함께 초대석] 이창수 시인에게 듣다


세 권의 시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창수 시인을 만나 그의 시세계와 창작의 원천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창수 시인은 첫 시집 『물오리사냥』을 시작으로 『귓속에서 운다』 『횡천』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왔다. 그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시에 담긴 사유와 감정의 깊이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金 이창수 시인님, 독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李 반갑습니다. 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지난 2000년 『시안』으로 등단했습니다. 보성 출신 문인으로는 문정희·고은기·박라연·염창권·송경동 시인이 있고 소설가로는 조정래·송기원 선생이 있습니다.

저는 90년대 말 조태일 시인이 출강하시던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쳤고, 등단 이후 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좋은 문인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분들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물오리사냥』, 『귓속에서 운다』 두 권의 시집과 2022년 『횡천』을 출간했습니다.


서울에 올라간 10년만인 지난 2013년 고향 보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인문학 교실을 열고 분야별 전공 선생님들을 초빙해 시, 소설, 철학 등을 수업했습니다. 김도언·박형숙 씨가 소설을, 시는 손택수·유홍준·이재훈·이혜미 등이 진행하였고 평론가 이성혁과 광주대학교 김은수 교수가 철학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시인이며 극작가인 최치언과 연극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등 연극 여러 편을 만들어 광주와 서울 부산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4년 동안 ‘시가흐르는행복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힘든 일들이 생겼습니다. 한계를 극복하고자 장소를 광주로 옮겨 ‘시가흐르는행복학교’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공무원 신분으로 인문학 관련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金 시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李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빌려서 읽은 책이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책 읽는 게 좋아 수업이 끝나면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 후에는 조그만 수첩에 마음에 드는 글귀를 적는 게 취미였습니다. 전남대에 다니던 큰누나가 그걸 보고 너는 나중에 시인이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시인의 꿈을 키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광주진흥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문비문학회>에서 문집을 만들고 시화전을 개최하는 일이 제게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승권 시인이 국어 교사로 문예반을 지도하셨습니다. 최승권 선생님은 제가 2학년 때 군에 입대하셨는데 인연은 짧았지만 기억은 강렬했습니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광주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였던 조태일 시인을 만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조태일 선생은 광주대학교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지역 대학생들의 한계를 열어주신 분이었습니다. 조태일 시인 덕분에 신경림, 오세영, 황지우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金 서정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사물의 속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흔히 서정시를 시간예술이라고도 하는데, 이 선생님에게도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가 많겠지요? 그 시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세요.


李 저는 보성의 자작일촌自作一村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뒤로 비봉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앞에는 드넓은 백사장을 배경으로 보성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밖에서 보면 지극히 평범한 농촌인데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가족 간 반목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해방 후에 좌우 이념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합니다.


할아버지는 젊어서 공무원을 했고 해방 후 두 차례 도의원을 지냈다 합니다. 덕분에 해방 후 좌익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여순사건 전후로 좌익들이 한밤중 마당에서 안방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문턱을 뚫고 들어가 당시 초등학생이던 고모와 사촌 형님의 머리를 관통했다 합니다. 이들의 죽음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질도 당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혈연관계라 그 모멸감은 더욱 컸겠지요.


아버지의 바로 위 형님과 사촌형님이 여순사건 후 월북하였습니다. 다들 쉬쉬했지만 가까운 친척 중에 북한을 선택하신 분들이 몇 분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합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한국전쟁보다 여순 사건 이후가 더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우리 집안은 이복형제들 사이에서도 반목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고모는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집안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해소되기 어려운 갈등이 첩첩 쌓여 있었던가 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린 시절 마을에서 추억이 많았습니다. 어른들을 만나면 큰소리로 인사하고 용돈을 받았습니다. 친척 어른들은 큰 소리로 인사하는 나를 보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용돈을 주셨고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방앗간을 하던 당숙과 과수원을 하는 작은아버지는 늘 자전거 뒷자리에 저를 태우고 다녔습니다. 보성강에 가서 투망을 던지거나 공기총으로 새 사냥을 나갈 때마다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공부하라고 닦달하시는 아버지보다 저를 자전거에 태우고 보성강을 달리던 집안 어른들이 더 좋았습니다. 지금도 강가에 나가면 작은아버지와 당숙이 투망을 던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조카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만 그때의 당숙이나 작은아버지처럼 조카들을 살갑게 대하지 못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곡哭


수원 큰형님에게서 시제에 가자고 전화가 온다. 선산은 어렸을 적에 가보고 지금껏 가보지 않는 곳이다. 선산으로 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 선산 앞에 흐르는 강을 업어서 건네주던 당숙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형님의 목소리도 잊어버리고 누구냐고 되물을 때도 있다.


시제를 모시고 난 후 떡과 고기를 나눠주는 당숙들은 분배의 천재들이었다. 제사상 앞에서 당숙들에게 아이고와 어이의 차이를 배웠다. 아이고는 친부모와 조부모상에서만 내는 울음소리이고 어이는 가까운 친척이 죽었을 때 내는 울음소리라 했다.


시월이 깊어지면서 강물이 곡을 한다. 허리 한번 내어준 적 없는 조카들이 선산으로 가는 긴 다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웃는다. 다리 밑으로 아이고에서 어이로 울음소리를 바꾼 강물이 흘러간다. 강물이 당숙들의 묘지를 싣고 머나먼 세상으로 흘러간다. 나는 울음소리의 바깥에서 저 아련한 슬픔 넘어가는 또 다른 울음의 너울을 보고 있다.

                                      — 『귓속에서 운다』, 46쪽





金 첫 시집 『물오리사냥』에서 물오리와 사냥꾼의 관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李 물오리는아이들의 돌팔매질로는 잡을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머리가 좋아 사람이 다가오면 곧바로 잠수해버리거나 하늘로 날아가 버립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제가 물오리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에게 물오리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영매인 동시에 자신의 소망을 하늘에 전달해주는 메신저이겠지요.

소년이 던진 돌멩이는 두꺼운 얼음 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봄이 오고 따듯해져 얼음이 녹고 홧김에 던진 돌멩이도 강물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소년의 어지러운 발자국도 녹아 사라져 버립니다. 세월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지워준다고 믿습니다.




물오리 사냥


겨우내 물오리 한 마리 잡지 못했다

분풀이로 두텁게 얼은 얼음 내리쳤던

돌멩이도 두고 왔다

매화꽃 필 무렵 풀린 강물에

그 돌멩이 깊이 가라앉았다

면면하게 흘러가는 강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영하 10도의 눈밭에 찍힌

고적한 발자국도 사라져버렸다

다만, 강물 속에는

구름상여 끌고 가는 물오리가

물그림자로 어른거리고 있을 뿐이다

                                          — 『물오리사냥』, 85쪽




金 『귓속에서 운다』 시집의 주된 관심사와 이 시집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李 서울로 올라온 이유는 대학원에 진학해 제대로 시 공부를 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생각대로 순조롭게 공부도 하고 좋은 시인들과 어울려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고 책을 읽고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시에 생활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위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후배를 따라 잠시 이태원에 갔다가 거기에서 경험하지 못해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들어온 이국의 사람들과 그보다 더 복잡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자리와 종교와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에덴의 저쪽」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사슴」 같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1

트랜스젠더와 주차장 영감이 싸웠다

영감이 트랜스젠더에게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부른 게 발단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차라리 년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는다고

싸움을 구경하는 미국인들에게 호소했다

미국인들이 년과 놈의 차이를 이해하는지 알 수 없지만

트랜스젠더의 호소에 환호로 답했다

호소의 힘은 언어의 밖에 있다

광산의 고싸움이나

청도의 소싸움처럼

이태원에도 년과 놈이란 호칭 때문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있다


2

가브리엘이 왔다

그는 민중의 지팡이답게 지팡이를 짚고 왔다

가브리엘을 보자 트랜스젠더의 바지춤을 잡고 있던 영감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트랜스젠더는 긴 손을 휘둘러 영감의 민머리를 내리쳤다

가브리엘의 등장으로 영감은 기고만장했지만

양성애자인 가브리엘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3

가브리엘의 임무는 이해 불가한 싸움을 말리는 데 있지만

년과 놈에 대한 개념이 확실한 영감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영감은 그게 있으면 남자고 없으면 여자라는 입장이었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다고

미국과 이라크의 싸움도 같은 이치라고

주차장 영감을 설득했지만

고추 달린 게 놈이지 년이야!

소귀에 경 읽기였다


4

가브리엘의 등장으로 싸움은 끝났다

이놈 저놈 이년 저년

미국인들도 싸움의 원인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싸움의 원인보다는

싸움의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미국인들은 새로운 전장을 찾아가고

트랜스젠더는 경찰서로 가고

영감은 다시 주차를 시작했다

흑인과 백인 동남아인과 동북아인들이

바쁘게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유목민은 초지를 찾아서

농경민은 초지를 불태워 밭을 갈고


5

아담의 갈빗대로 이브를 만든 것은

아담의 쓸쓸함을 달래주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다

세상의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저 많은 술집이 생겨났다

세상의 모든 쓸쓸함은 술집으로 흘러가고 술집에서 나온다

쓸쓸함을 잊기 위해

아담의 후예들이 술을 마신다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서로 멱살을 잡고

남의 일에 참견하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태초에 쓸쓸함이 있었다


6

싸가지 없는 비가 한 달이나 내렸다

지하에 물이 차서

트랜스젠더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빗소리만 남았다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어떤 소나무 나무를 지칭하는지 궁금해

우산을 쓰고 남산으로 산책 갔다

안익태 선생이 외국 생활을 너무 오래했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남산타워에서 시내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7

주차장 영감은 그게 있지만

남자 구실을 못하고

트랜스젠더는 그걸 버려서

여자로 대접 받는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용기로 몸을 바꾸려 하고

주차장 영감은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라 한다

의지와 순응 사이에서 폭력이 발생하는데

이태원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 『귓속에서 운다』, 77쪽




손택수 시인 외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에 이야기하는 시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실천문학사 손택수 시인 덕분에 『귓속에서 운다』를 낸 후 보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시 공부하러 서울에 가서 시집을 두 권이나 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다니 조금은 얼떨떨했습니다.




홍어


  친구 조현수가 호남 최대의 禮式場에서 결혼했다. 호남 최대의 禮式場에서 결혼한 조현수는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십 년 뒤 우리는 조현수의 부고 듣고 호남 최대의 禮式場으로 모여들었다. 호남 최대의 禮式場의 간판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어 있었다. 달라진 건 한 글자 밖에 없었으나 禮式場과 葬禮式場의 간격은 이승과 저승만큼 멀었다. 빚보증 서주고 갈라선 조현수와 나와의 거리만큼 멀었다. 친구 조현수가 고등학교 동창들의 환호와 축가 들으며 신부의 손 잡고 입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가의 곡소리 들으며 누워 있었다. 젊은 그의 아내는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에서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눈물 쏟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그녀가 눈물 흘릴 때 하객들이 박수쳤으나 이번에는 조문객들이 가슴을 쳤다. 내 친구 조현수가 단 한 글자로 뒤바뀐 이 비운의 건물에서 수의 입고 조문객들 맞고 있을 때 나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홍어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조의금 세다 생각난 듯 눈물 흘리는 그의 일가를 보면서 禮式場인지 葬禮式場인지 헷갈리던 나는 박수나 가슴 대신 화투를 쳤다. 조현수의 죽음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호남 최대의 禮式場이 호남 최대의 葬禮式場으로 바뀌듯 이해되지 않는 슬픔에 무작정 동참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건물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이해와 동의를 얻지 못하는 조현수와 고등학교 동창들 어느 누구도 간판에 덧붙여진 한 글자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禮式場과 葬禮式場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홍어에 대해, 홍어의 불가해한 맛에 대해 골몰할 뿐이었다.

                                                             — 『귓속에서 운다』, 50쪽




金 시집 『횡천』에서는 강물의 이미지를 통해 삶의 흐름과 변화를 표현하셨습니다. 강물이 시인에게 어떤 사유와 감각으로 작용했는지 궁금합니다.


李 제 시에는 물에 대한 이미지가 참 많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물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시를 쓰면 마음이 편해지고 시도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시인들이 물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저도 그렇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처럼 인간의 삶도 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횡천』은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소재지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횡천은 지리산에서 흘러와 노량을 향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습니다. 횡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학동과 삼성궁이 나옵니다. 청학동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청학동입니다. 삼성궁은 청학동 바로 옆에 있는데 민족의 성조인 환인, 환웅, 단군 이렇게 우리 민족의 시조인 세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청학동에 갔다가 우연히 삼성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찾게 되었습니다. 횡천의 종착지가 노량 바다입니다. 하동에서 남해를 이어주는 노량대교를 건너 고현면에 이르면 이순신 장군의 순국지를 만나게 됩니다.


지리산과 노량에서 저는 우리 역사에서 누락 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역사책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리산이나 남해에서는 아주 잘 보입니다. 제가 지리산을 자주 찾고 횡천에서 물소리를 듣는 이유입니다. 깊은 산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모여 강물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는 게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것만 같습니다. 물의 순환은 부처님의 말씀 같기도 합니다.




횡천橫川


시냇물이 옆으로 흘렀네

마을에 식자가 있어 횡천이라 불렀네

시냇물 따라 버드나무가 자라고

버드나무는 새와 구름 불러왔네

냇가에 작은 술집도 생겼다네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옆으로 걸었네


횡천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학 날아다니는 청학동이 나온다네

시절이 하 수상해지면

순한 사람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살았네

사나운 도적들 찾아왔지만

나무꾼이 되거나 더 깊은 산으로 갔다네


횡천에 다리가 놓이고 시장이 섰네

길이 포장되고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네

사람들도 앞만 보고 걸었네

구불구불 길도 직선으로 바뀌고

논도 밭도 바둑판 되었다네

사람들은 직선을 숭배했다네


그러든 말든 횡천은 옆으로만 흘렀다네

횡천 가로질러 그물이 쳐 있었으나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네

밤 강물에 일월성신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건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고기라서

마을 사람들 본체만체 지나갔다네

                                  — 『횡천』, 13쪽




金 세 권의 시집을 집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시각이나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 변화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李 첫 시집 『물오리사냥』은 청년기에 고향에서 쓴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래도 청년기에 쓴 시들이라 투박한 시들이 많습니다. 두 번째 시집 『귓속에서 운다』는 작품 대부분 서울에서 쓴 시들입니다. 대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많고 아이러니 비애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세 번째 시집 『횡천』 은 광주에서 정리해서 그런지 상당히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시집 이후 시에 집중하기 힘든 시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분량이 55편으로 다른 시집보다 편 수가 적습니다. 첫시집이나 세 번째 시집이나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읽어보니 새삼 그 차이가 크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공간이나 나이 주변 환경이 이처럼 인식의 차이를 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金 창작 과정에서 감정의 기복이나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李 『귓속에서 운다』를 내고 난 후 세 번째 시집 『횡천』을 내기까지 십일 년이 걸렸습니다. 시 쓰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의사는 강박이 심하다며 약을 주더군요. 의사가 주는 하얀 알약을 삼키고 산과 들을 헤맸습니다. 당연히 시가 써지질 않았습니다. 새벽에는 사람이 많은 피시방에 가서 아무 글이나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해도 시 한 편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슬럼프가 오기 마련입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면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땐 가벼운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오랫동안 걷기 운동을 하는 겁니다. 한두 시간 걷기 운동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걷기 운동을 하다가 지리산 천왕봉에 혼자서 올라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지리산에 올라갔다가 커다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뒤로도 지리산을 찾아 걷는 게 저의 생활이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독서, 낯선 곳의 여행 등이 삶에 창작활동에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자연은 순리를 인내를 이해를 가르쳐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봄의 동력


매화나무에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매화나무 울타리에

벌들이 구름 화물에서 날라 온 석탄 퍼붓고 있다

겨울에 어머니는 고운 옷 입고 화장하고

외할아버지 곁으로 아주 떠났다

겨울에서 봄까지 나는 쓸쓸해져서

어머니 없는 골목에 오래 서 있었지만

매화나무 공장에서 야근하는 일벌들

봄 울타리 여느라 분주하다

                                         — 『횡천』, 10쪽




金 시를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험이 현재의 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李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세 번째 시집 『횡천』을 낼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쉰 살을 넘기면서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강박과 우울이 심해졌습니다. 겉으로 쾌활하고 속으로 우울한 사람이랄까요? 강박과 우울은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자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울을 앓지 않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울을 극복하지 못하는 시인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울을 겪지 않아야 하지만 창작자에겐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울하지 않고서 어떻게 시를 쓰겠습니까?




흰 알약


의사는 불안이 찾아왔다고 했다

작고 흰 알약이 든 약봉지 주었다

아지랑이 몽롱한 봄 들녘 걸었다

평생 흘릴 땀 며칠 사이에 흘렸다

흰 알약 삼키고 호수 돌았다

수면 가득 벚꽃과 목련 피었다

발 씻고 머리 감는데 훌쩍이는 소리 났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 『횡천』, 22쪽




金 시를 쓰지 않을 때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이 활동들이 시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요?


李 혼자 있을 때 산책을 하고 지금 사는 곳에서 되도록 멀리 여행을 갑니다. 물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적이 더 많지만, 사는 곳에서 멀리 가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다양한 책을 사려고 노력합니다. 생각처럼 자주 책을 사고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좋은 책을 읽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행과 좋은 독서는 나를 새롭게 하는 동력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경우 서울에서 살 적에는 목욕탕이 가장 좋은 피서지였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사람이 덜 찾는 허름한 목욕탕을 찾아다녔습니다. 광주에서는 지리산을 비롯한 마이산 남해 금산이 제가 즐겨 찾는 장소입니다. 집에서의 조용한 독서보다는 산이 더 안정감을 주더군요.




일심一心


어깨에 一心이라는 문신을 새긴 사내가 목욕을 하고 있다. 열탕에 몸 담그고 두 눈 꼭 감고 있는 이 사내의 몰골에서 젊은 시절의 무용담을 느끼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어물전 노인들 상대로 자릿값이나 뜯었을 행보가 엿보일 뿐이다. 사내의 一心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사내의 흰머리를 본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을 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좁은 어깨로 무리를 이끌었을 리는 더더욱 가망 없어 보이는 사내의 一心이 보일 듯 말 듯 열탕에 잠겨 있다.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사내의 어디에도 잠룡의 기개는 보이질 않는다. 목욕탕에 희미하게 떠 있던 一心이 사내를 따라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린 뒤 열탕에 앉아 오래전 열망이었던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를 내 몸에 뱀이나 용으로도 새겨 넣지 못했던 용렬함으로 고백하건대 나에게는 一心이 없다. 나에게 없는 一心인 오래전 그대를 지금 무슨 면목으로 뒤돌아볼 것인가!

                                                        — 『귓속에서 운다』, 52쪽




金 독자들에게 시가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바라시나요?


李 제 시는 이 세상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 우리가 자주 가는 장소에 제 시가 있습니다. 제가 쓰는 시어는 어렵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어려운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시는 개인의 언어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시는 그 뜻은 몰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무엇보다 시를 가까이 두고 읽는 일이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두승산


대선 끝난 후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품 있는 정치와 만나 가난과 질병마저 사라졌으니 불평과 불만은 국경 너머로 물러갔다. 오로지 나만 오래 앓던 중이염 때문에 언론을 곡해하고 다투기 멈추지 않아 무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한여름 무더위에 버스 갈아타고 고부면 두승산 꼭대기에 머물게 되었다. 사방 백리가 내려다보이는 느티나무에 등 기대고 내가 떠나온 먼 곳 보았다. 나를 따라온 한숨들이 느티나무 흔들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변산 바다로 젖어들자 산봉우리에 모인 작은 바람이 더 큰 바람 불러 모았다. 밤새 바람이 두승산의 날개인 느티나무 흔들어 두승산을 공중에 띄울 기세였다.

                          — 『횡천』, 67쪽




金 문학적 성공보다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시인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李 문단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시보다 이름이 더 유명한 시인들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보다 시를 먼저 봅니다. 갈라진 아스팔트 틈에서 자라는 작은 풀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틈에서 뿌리내리고 꿋꿋하게 버티는 걸 보면 경이롭기만 합니다. 시인이란 이 풀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서 불가능을 딛고 생존하는 존재가 시인이라고 믿습니다. 좋은 시인은 이런 생명들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金 앞으로 계획 중인 작품이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李 지리산은 저에게 있어 반드시 읽어야 할 두꺼운 책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지리산에서 보고 느낀 것들 이미지들을 그리고 보고 느낀 것들을 시로 정리할 것입니다. 이게 지금 현재의 제 목표이기도합니다.



金 젊은 시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창작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李 세상일이 다 그렇겠지만 문학 하는 행위도 마라톤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조태일 선생은 “술을 마셔야 좋은 시를 쓴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회적으로 예술가들이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주어야 하는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습니다. 저는 혼자서 오래 자주 걸었습니다. 그게 확실히 건강이나 시창작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가 길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들이 너무 산문화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시에 대한 제 철학이 있다면 시는 무조건 짧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짧다는 말은 시의 분량을 뜻 하는게 아닙니다.



金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李 시가, 시인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즐겨 읽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써야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창수 시인의 시세계가 단순한 언어의 집합이 아니라, 그의 깊은 내면과 철학을 담은 삶의 기록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세 권의 시집이 보여주는 일관된 주제와 변화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성장을 잘 드러낸다. 『물오리사냥』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귓속에서 운다』를 거쳐, 『횡천』에 이르기까지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창수 시인은 앞으로도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시로 풀어내는 작업을 지속할 것임을 밝혔다.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지 기대되는 가운데, 이창수 시인의 작품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번 인터뷰는 그의 시세계와 창작과정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으며, 그의 미래 작품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주었다. 앞으로 이창수 시인의 좋은 작품을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https://youtu.be/PKjTjtMc3vE?si=3LKEBsGNSXHESc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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