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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들여다본다』_ 한정수 시집

by 꿈이 크는 나무

『나를 들여다본다』 한정수 시집을 읽으며


여름의 끝, 한 권의 시집이 내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삶의 고비마다 병마와 마주하면서도 조용히, 묵묵히 시를 써온 시인의 문장들을 한 편 한 편 읽으며, 나는 어느새 그의 삶을 함께 걷고 있었다. 단순한 편집이 아니었다. 그 깊은 언어들 속에서 나의 시간을 돌아보았고, 문득 부모님을 떠올리며 오래도록 마음이 울컥했다. 아픔 속에서도 삶을 노래하고, 희망을 건네는 시인의 시들이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책을 선물로 받았다. 온전히 책이 되어 돌아온 시집을 마주한 순간, 그 여름날의 조용한 작업들이 떠올랐고, 이 책이 누군가에게도 작은 빛이 되길 바라게 되었다.


이제, 그 시집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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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첫 시집, 일흔의 고백


『나를 들여다본다』는 시인 한정수의 첫 시집이자, 일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발표한 시편을 모은 깊은 감정의 총합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품었던 꿈을 이룬 결과물이기에, 시인은 이 시집을 "각별하고 벅찬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오랜 시간 자신을 지탱해 준 시에 대한 고백이자, 감정의 파편을 엮어낸 고요한 회고록이기도 하다.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이런 문장을 만난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시는 늘 제 곁에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을
시는 조용히 받아 주었습니다.
-『나를 들여다본다』 시인의 말 중에서


삶의 고통과 상실, 그리움과 사랑을 시로 담아내는 이 시집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다.




제1부: 나무들, 벌레를 사랑하다


제1부는 시인의 자연관과 생명관이 고스란히 담긴 섹션이다. 고구마, 고추, 감나무, 개구리, 담장나무, 금목걸이, 벌레들, 나무들…. 시인의 시선은 사소하고 평범한 자연물에 머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삶의 철학과 깊은 공감의 시선이 담겨 있다.


대표작인 「나무들, 벌레를 사랑하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그래도 나무들 역정 한 번 내지 않는다.
주고 또 주고 죽어서도 주는 나무들


작은 벌레들과 공존하는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인생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자연은 그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삶을 배우는 스승이 된다.


이 부의 제목과 동일한 시 「나무들, 벌레를 사랑하다」를 통해 시인은 공존, 배려, 나눔이라는 키워드를 조용히 전달한다.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금목걸이


한정수



엄마는

닷 돈짜리 금목걸이 하고

장에 가셨다가 잃어버리셨다.


혼자 속앓이하시다가

어느 해, 생신 날

자식들 성화에 털어놓으셨다.

“목걸이 차고 간 내가 잘못이지.

감쪽같이 훔쳐 갔지 뭐냐!”

“쓰리꾼이 따갔구나. 걱정 마. 엄마.

새로 하나 사 드릴 게.”

“까짓 목걸이 실컷 차 보았다.

없어도 괜찮다.”고 하시는데,

눈가에 설핏 아쉬운 빛 스쳐간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목걸이 못 사 드리고

돌아가신 뒤에야

가슴을 친다.

엄마는 쓰리꾼보다 자식들을

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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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봉분 없는 무덤


제2부는 시인의 내면과 사회를 향한 시선이 교차되는 시편들로 채워진다. 「뜨거운 눈물」과 「빨랫줄과 바지랑대」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회초리」는 아버지를 기억하며,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탐색하고 있다.


눈만 감으면 현현顯現하시던 꿈속의 어머니
생전生前 그 말씀 들리는 듯하나
아무리 눈을 감아도 눈 마주칠 어머니는 아니 계시다.


이 구절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이 시집에서 어머니는 단지 개인적인 인물이 아닌, 모든 이의 원형적 존재로 자리 잡는다. 특히 「병과 함께 사는 법」에서는 병과 공존하는 법을 익히는 시인의 태도가 등장한다.


놈과의 사투를 앞두고,
그날이 언제이든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쓸 수 있는 날까지
악착같이 살아 보기로 했다.


절망이 아닌 다짐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 시집의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봉분 없는 무덤


한정수



동생 무덤 찾아 산을 뒤지는데

다람쥐 한 마리

뽀르르 나타나

두 손을 싹싹 비벼댄다.


다섯 살 내 동생 하얀 꽃상여 타고 가던 날

그때도 저 다람쥐 두 손 모아 빌었을까?


봉분 없이 자식 묻은 엄마의 슬픔

온 산을 적시고

나뭇잎 잎 잎에

바람 조각 몸을 떨 적에

냇물은 가던 걸음 멈추고

머언 하늘 노을 배웅했으리.


그 냇물 흘러 마음 강에 다다라서야 나는 알았다.

봉분 없는 무덤 찾아 산을 헤매는 것은

그리움의 멍울이 자꾸만 커 가기 때문이다.

오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엄마의 가슴에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십 년 뒤에 다시 오면 그때도

저 다람쥐 뽀르르 나타나

두 손을 싹싹 비벼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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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소년의 꿈


한정수 시인의 유년 시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제3부는, 눈 오는 날의 기억, 아버지의 구두, 바지랑대, 엄마의 손목시계 등 잊히지 않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소년 시절의 순수와 아픔, 애틋함을 회상하며 삶의 원천을 회복한다.


햇살 좋은 날 빨래 널고 바지랑대 높이 받치시며
흡족해 하시던, 보고픈 엄마.


이는 단지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이끌어주는 내면의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 시편들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어떻게 이끄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빠 눈사람


한정수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열 살짜리 손녀 그림,

배불뚝이 눈사람 하나

덩그러니 그려 놓고

제 이름 꾹꾹 눌러 써 놓았다


누가 봐도

제 아빠 배 나온 것을

본 대로 그린 그림


딸 바보 애비,

알아서 살 좀 빼면

얼마나 좋으랴?

걱정하는 식구들 마음

빗대어 그렸으리


아파트 놀이터,

엊그제 세워 둔 눈사람은

그새 살이 홀쭉 빠졌던데

손녀 그림 배불뚝이는

볼수록 더 불러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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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코스모스 사랑


마지막 제4부는 좀 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시편들로 구성된다. 「자전거 타는 법」, 「친구 생각」, 「포도알 눈물」, 「코스모스 사랑」 등은 시인이 인생의 노년기에서 바라본 세계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풍경은 정적이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해순이
하루살이
인수봉을 처음 오르며…


시인은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마저도 세상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흔들리지만 꽃을 피운다. 시인의 시도 그러하다.




포도알 눈물


한정수


앞마당 우물가 포도 덩굴 받침대에

이제 막 농익은 포도송이와

단내 맡고 날아온 벌들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중환자실 하얀 시트 위, 어머니는

야윈 어깨 들먹이며

포도알보다 더 커다란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눈물은

내게 준 마지막 선물


그리운 눈길 들어

‘어머니, 포도 한 송이 따 드셔 봐’

가만히 엄마에게 권해 봐도

포도송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

어머니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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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 시집 『나를 들여다본다』가 전하는 것


한정수 시인의 시는 조용히 다가온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단단한 고요다.

세상의 소음 대신, 자신의 내면을 향한 깊은 울림을 선택한 언어들.

그 시는 다정하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을 들여다보았는가."



한정수 시집 『나를 들여다본다』마무리하며


한정수 시인의 첫 시집 『나를 들여다본다』는 삶의 구석구석을 응시한 따뜻한 시선의 기록이다. 고통과 회한, 그리움과 희망이 조용히 배어 있는 그의 시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린다. 이 시집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진심 어린 문장으로, 나이 듦의 고요함 속에서도 여전히 꿈꾸고 사랑하는 삶을 노래한다.


시인은 말한다. "악착같이 살아 보기로 했다"고. 그리고 그 다짐은 곧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늦게 피어난 꽃이 더 짙은 향기를 품듯, 그의 시는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위로의 언어다. 이 시집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한 응원으로 남는다.



image.png?type=w1 한정수 시집 『나를 들여다본다』 해설 _ 그리움의 시적 귀환 그리고 공존의 삶 _ 김병호(시인·협성대 교수)




한정수 시집 『나를 들여다본다』_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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