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그냥 영화나 좀 보실래요?
그와 난 정식으로 만나보기로 했다. 무언가 마음을 내려놓아서 인지 그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와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다음 우리의 첫 데이트가 있는 날. 어떤 옷을 입을까 하고는 행거를 뒤적였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를 만나러 갈 때 전부 치마를
입었었다. 왜였지? 난 원래 바지를 좋아하는데 뭔가 여자 여자하게 보이고 싶었나? 하고 생각하며 옷을 골라 들었다.
그와 만나기 시작할 때쯤 전국에 렛잇고 열풍이 불고 있었다. 난 원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저 괜찮다는 그와 겨울왕국을 보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영화관으로 올라오는 날 발견한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안 추워요? 따뜻하게 입지.. “
“ 추워도 안 추워요. “
“ 네? ”
“ 아니, 안 춥다고요. 영화 곧 시작하겠어요. 들어가요. 우리.”
난 그날 청바지에 검정 목폴라를 입고 조금 두꺼운 쟈켓을 걸쳤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의 날씨는 흐렸고 추웠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눈에 그냥
내가 추워 보였나 보다.
팝콘과 음료를 사들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커플석을 예매해 두었다. 난 속으로 “ 그냥 일반석이 편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팝콘을 가끔 입에 넣으며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데 오른쪽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앞이 아닌 날 보고 있었다.
“ 뭐해요? “
“ 아니 그냥 좋아서요. “
물음표를 가진 얼굴로 내가 멀뚱이 쳐다보자
웃으면서 내 얼굴을 건드리는 그.
이제 고작 네 번 본 내가 뭐가 그리 좋다고 영화는 안 보고 날 보고 있다니. 이번엔 진짜 물음표가 생겼지만
“ 영화에 집중해요. ”라고 말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돌려 앞을 보게 했다. 자꾸만 내가 좋다고 말하는 이 남자. 진심이겠지만 내겐 뭔가 조금 급하게 들렸다. 적어도 감정표현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나에겐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n 카페.
이 남자 말고도 여러 사람들과 왔었던 이곳. 복잡한 듯 보여도 잘 정돈된 이곳의 분위기가 난 마음에 들었다.
전 남자친구와 자주 앉았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그 자리를 피해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전 남자친구가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 남자에게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 뭐 마실래요? ”
잠깐 생각에 잠긴듯한 나를 깨우는 그의 목소리.
“ 아, 전 캐모마일티요. “
“ ㅇㅇ씨는요? ”
“ 전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
“ 제가 주문할게요. ”
“ 내가 해도 되는데요. “
“ 괜찮아요. “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 여기 커피숍 괜찮네요. 분위기도 좋고. 처음 만나자고 했던 그곳은 간판이 작아서 너무 찾기 어려웠어요. “
“ 아 거기 출입구가 좀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근데
전 거기도 좋아해요. “ 묻지도 않은 대답을 덧붙이는
나였다.
“ 그런데요. ”
“ 네? “
“ 우리 호칭 정리 할래요? “
“ 음, 좋아요. ”
“ 어떻게 부르는 게 좋아요? 이름? 아님 다른 거? “
“ 난 내 이름이 별로 맘에 안 들어서 이름은 싫고…
누나는 싫죠? “ 재밌지도 않은 내 농담에
“ 아 뭐 한 살 밖에 많지 않은데 무슨…“
그랬다.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사실 난 연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연하를 만나다니 어찌 보면 우습기도 했다.
“ 화내는 거예요? 나 농담인데. “
“ 아니 그게 아니고요. ”
“ 농담이에요. 큭큭. “
“ 아…. “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와 나는 농담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다.
“ 그래서 뭐가 좋아요?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어요?
“ 음… 그냥 자기 어때요? 그게 젤 편할 것 같은데…“
“ 괜찮아요. 그리고 말도 편히 하게요. “
“ 하게요. 이 말 좀 어감이 그래요. 뭔가 혼자 결정하고 알려주는 느낌? 처음 만나기 전에 문자 할 때도 ‘먹게요.’ 이 말이 좀 그랬어요. “
“ 아, 그냥 하자는 거고 먹자는 이야기인데요. “
“ 아, 그랬구나. 내가 오해했나 봐요. “
“ 그럴 수도 있죠. 아, 이게 혹시 사투린가? ”
사투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전라도 남자였다.
전. 라. 도. 여. 수. 남. 자.
전라도 특유의 성향? 을 살면서 난 점점 느끼고 있다.
무튼 그렇게 우린 호칭을 정리하고 말을 놓았다. 그와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카페를 나와 혼자 집에 가겠다는 나를 극구 집에 바래다주고 가는 그.
돌아갈 길이 먼 그에 대한 나의 배려가 무색해졌지만 그가 원한 일이었으니 그걸로 됐지 싶었다.
만날 때마다 나에게 물음표를 만드는 그.
다음번 만남에서도 그는 나에게 큰 물음표를 선사했다.